[TS] 국가직 공무원
5700자 쪽지를 보냈더니 헌터물 세계에 미소녀로 전생!
O스하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하는 캐릭터가 되었다는데요...?
0.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웹소설 <국가직 공무원>의 여주인공중 하나, 천우연의 인생이.
그녀는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능력자의 출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국가직 공무원>의 세계는 '관료제적 다크판타지'를 지향한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알 것이다. 천우연이 대충 어떤 배경설정의 인물일지는.
그래도... 딱 불쌍하다는 생각까지만 했어야 한다.
소설에 과몰입해서 5700자의 항의 쪽지를 보내는 게 아니라.
1.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감시카메라가 방 안을 비추지만 녹음기는 없다. 여기서 이루어질 대화는 녹음되지 않아야하니까.
일러스트에서 묘사된 외모와 꼭 닮은, 정장 차림의 지적인 훈남이 들어온다.
신세준.
서울대, 아니 이 세계관에서는 한국대 출신의 젊은 관료였던가. 원작 주인공인 성시현의 전담 공무원 역시 그였다.
'안됐네요. 좋은 학교 나와서 고시까지 붙고 하는 일이 실장 노릇이라.'
그렇게 비꼬고 싶었지만 그만뒀다. 그는 막장 세계관인 <국가직 공무원>에서 몇 안 되는 인간적인 남자. 천부인권이 어쩌고 하는 구세계의 윤리를 진지하게 믿는 인물이었다. 안 그래도 불편할 그의 마음을 굳이 자극할 이유는 없다.
곧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세준은 짐짓 담담한 투로 입을 열었다.
"천우연 선생님?"
"......네."
"관문관리부 특무청 소속의 신세준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근로조건에 관해 간단히는 전해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네."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세일럼-O 능력자 연구센터'는 명목상으로 초상능력의 미시적 작용을 다루는 국책 연구소입니다. 선생님은 현재 관문부 소속의 9급 공무원으로 고용되었으며, 사무보조로 시설에 파견된 상태입니다."
잠깐, 침묵. 세준은 여전히 냉정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간다.
"여기서부터는 1급 비밀입니다. 실질적으로 센터는 선생님의 '능력'을 최대한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이는 SA급 예지능력자인 유진경 국장님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이런 수단까지 동원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존립이 위태롭다고 예지된 바, 천우연 선생님께서도 국가적 대의를 위해 이에 자발적으로 동의하셨습니다. 그렇지요?"
"그랬어요."
"...좋습니다. 근로조건 및 능력에 관한 세부사항은 이 사본을 참조하십시오. 사본은 곧바로 회수하여 소각할 것이며, 진본은 국가기록원에 비밀 해제시까지 보관됩니다. 또한 실제 급여는 5년차 SA-UM급 능력자가 민간군사기업에서 지급받는 액수에 준하여 지급될 것입니다. 지급액의 20%는 가족들에게 현금으로 전달되고, 나머지 80%는 차명계좌로 입금됩니다."
개략적인 설명을 마친 세준은 서류가방에서 스테이플러로 찍힌 종이 뭉치를 내민다. 문서 제목은 더없이 딱딱하지만 단순하다. 'SA-UM급 강화능력의 효율적 활용에 관한 보고.'
내가 읽을 필요는 없는 내용이 많다. 시설 운영이라거나, 의료진 인력이라거나, 심리상담사의 필요성이라거나. 주지해야 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그리 길지 않다. '능력의 특성' 및 '관리절차' 항목.
'샘플 채취 후 국립관문연구원에서 진행된 정밀조사에 따르면, 해당 능력의 상세한 특성은 다음과 같다.
...(중략)...
3. 정신적 암시 계열의 능력으로 추정됨. 따라서 능력자의 정신은 명정한 상태여야 하며, 약물•주류 등의 사용은 가능하지 않음.
3-1. 강화는 능력자가 행위를 '성적인 것'으로 명확히 인지하는 상황에서만 이루어짐. 따라서 각종 우회수단을 통한 발현은 불가능할 것으로 사료됨.
3-2. 상대의 성별과는 무관하게 발현되는 능력이나, 도구 혹은 신체를 통한 성적 삽입 없이 강화는 이루어지지 않음.
3-3. 행위에서 능력자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와 발현되는 능력의 강도 사이에는 양의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됨.
3-4. 다만 지나친 고통은 능력의 지속가능성을 현저히 저하시키며, 따라서 적당한...(하략)...'
'평시 능력자의 관리절차는 다음과 같다... 오후 열두 시에서 아홉 시까지 능력을 사용하고, 나머지 시간은 정기검진, 심리상담, 휴식 등의 적절한 배치로...이상의 절차는 능력의 효율적 활용과 지속가능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제안된것이며... 후속 연구에 따라 수정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끔찍하다. 이 문자들이 단순한 문자의 나열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될 일이라는 게.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걸 꾹 눌러 참는다.
보고서를 덮고 나자 세준은 다시 받아 가방에 넣는다. 그는 속을 알기 쉬운 표정으로 나를 잠깐 바라본다.
천우연이라면 무슨 말을 할까. 소설 속에 묘사된 천우연의 성격이라면. 소설 속의 천우연은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리는설정에도 불구하고 꽤 인기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선량한 성격의, 소위 '성스러운 창녀' 타입 캐릭터였으니까. 동시에 유약하고 동정을 얻기 쉬운 성격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세준을 부른다.
"...선생님."
"예."
"제가 실은 하고 싶지 않다면 어떡하실 건가요. 그냥 모두에게 등을 떠밀려서 이자리에 있을 뿐이라면."
내 말이 끝나고 긴 정적이 찾아온다. 세준은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있는다. 한참이지나서야 그는 겨우 다시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그에 답할 권한은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진다. 바보 같긴. 마음도 약한 사람이 왜 억지로 강한 척을 해서. 말을 마친 세준은 표정을 숨기려는 것처럼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난다. 방을 나가려 하는 그에게 나는 가볍게 사과한다.
"미안해요."
세준은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낮게 읊조렸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냥 한 번 떼를 써봤어요. 선생님이 이런 말을 들어야 할 분은 아닌데."
내가 사과를 마치자 세준은 문을 쾅 닫고서 떠난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잡생각을 한다. 레벤스보른이나 동유럽의'인종 정화' 캠프 같은 것들이 문득 떠오른다. 현실에서나 소설에서나 조용한 정상외교를 추구하는 한국에서 그와 같은사건이 일어난다면, 그냥 시끄러운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과정이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도 이해는 간다.
이윽고 감시역인 능력자가 들어와서 나를 데리고 나간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작가에게 묻는다. 왜 이런 인물을 만든 거야?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인물로 전락해야 하는 거야? 왜? 정말로 왜? 내가 도대체 무슨 큰 죄를 저질렀다고?
침실 겸 일터로 안내한 감시역은 문 앞을 서서 지킨다. 문을 열어보면 방 안에 창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기는 마치 병실처럼 음압기를 통해 들어온다. 그것만을 제외하면, 방은 꽤 넓고 온도는 딱 지내기 좋을 만큼 따뜻하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눕는다. 뭘 할까 하다가 그냥 자기로 한다. 오늘은 아직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자자. 자고일어나면 이 악몽에서 깨어날 것이다.
*
"씨발."
세일럼 센터의 정문을 나선 세준은 육성으로 욕을 내뱉었다. 설마 이런 일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진경 국장이 그를 독대하기 위해 부를 때까지만 해도,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1급 비밀이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스무살이라고 했다. 이제서야 막 성인이 된 애라고 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기로 결정했다고 유진경 국장은 말했다.
당연히 헛소리였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아무리 가족들이 걱정없이 살 수 있게 된다고 해도, 평범하게 살아온스무살짜리 애가 진심으로 이런 일에 자원할 리 없다는 것쯤은 세준도 알았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을 뿐이다.
우연은 당장이라도 울듯한 목소리로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고서는 미안하다고, 괜한 마음의 짐을 지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실 프롤로그도 아직 다 안 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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