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 나랑 해보겠다는 거냐.”
지하의 횃불이 비춘 그림자는 서른 명이 넘었다.
그들 앞에 선 붉은 머리 여자는 정장을 입고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들이 여기 모인 것은 세계 최고의 무기라 불리는 의룡검을 얻기 위해서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권모술수에 능하고 정보수집 능력이 뛰어나며 싸움에도 능한 전사戰士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온갖 암투를 펼쳤고 단서를 모았으며 세력을 만들었다.
마침 내 의룡검의 위치가 확정되었을 때 모든 이들이 현장에 뛰어들었다.
훗날 의룡전誼龍傳이라 전해지는 이야기의 마지막 관문은 제단의 불을 피워올리는 것이다.
원시천자의 제단에 불을 피우기 위해서는 예로부터 전사의 피와 땀이 필요했다.
모든 이들이 의룡검에 신경을 곤두 세운 가운데 제단 앞에 선 헤르마니아는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전신을 붉은 색으로 물들인 이 여자는 사상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지녔다.
그녀에 관한 소문으로는 맨 손으로 전차를 잡아 부쉈다는 것과 항공기 엔진에 빨려들어가고도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고층 빌딩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리고 부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는 거 등 믿을 수 없는 것 뿐이었다.
이번 의룡검 건만 하더라도 헤르모니아가 사막 한 가운데서 성배를 찾고 있더라, 하는 소문을 듣고 일에 뛰어든 전사만도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그녀가 있다.
전사들의 대부분은 낭패를 봤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곱게 기절할래 아니면 후유증이 남게 패줄까.”
의룡검을 손에 넣을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선 이 여자를 제일 먼저 처치해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그녀를 공격하려하거나 공격을 집중하자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서로가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었고 도화선에 불이 붙은 채 시간이 흘렀다.
이내 싸움은 예고도 없이 시작되었다.
“젠장, 헤르마니아부터다!”
전사들은 합심한 듯 헤르마니아를 둘러쌓았고 그녀는 재밌다는 듯 미소지었다.
남들의 움직임을 뒤에서 지켜보던 레가르는 전선에서 물러나 다른 생각을 했다.
어차피 여기 모인 전사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제단의 불꽃은 일찍 피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장기인 빠른 발로 의룡검을 수집해 달아나면 그만이다.
멍청한 무리들은 헤르마니아를 건든 업보로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공격할 것이고 도망치는 나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을 것이다.
계책을 세운 레가르는 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렸다.
헤르마니아는 전방에서 달려드는 전사의 턱을 날렸다.
머리를 맞은 전사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그 자리를 다른 전사가 채웠다.
예고도 없이 모인 이들의 연계가 깔끔할 리 없었지만 모두가 백전노장이었던 터라 헤르마니아의 움직임을 봉쇄할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착각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전사의 공격을 받아치고 흘리고 몰아내며 보이지도 않는 빠른 주먹으로 전사들을 쓰러뜨렸다.
뒤를 노리는 공격은 팔꿈치로 찍어 반격했으며 하단을 노리는 공격은 검 끝을 차서 흘려냈다.
헤르마니아는 늑대 무리 속 황소처럼 모두를 헤집고 다녔다.
일어서 있는 전사보다 쓰러진 전사가 더 많아졌을 때 제단에 불꽃이 일었다.
닫혀있던 석실의 문이 열리고 의룡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레가르는 기다렸다는 듯 석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원시천자가 만든 최고의 무기가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이제 몸을 내빼기만 하면 최강의 전사가 될 수 있었지만 그의 앞에는 헤르마니아가 있었다.
씨익. 비릿한 웃음을 지어보인 헤르마니아가 손에 잡혀있던 전사를 바닥으로 던지며 레가르를 바라봤다.
“그거 들고 도망갈 생각이었냐.”
“그렇다.”
“근데 조금 아쉽지 않아? 최고의 무기라고 하는 검을 들고서 이 나랑 싸워보지도 않고 가려고 하다니 말이야.”
어느 센가 헤르마니아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서른 명이나 되는 전사들이 벌써 당한 거냐고 따지고 들고 싶지만 그런다고 눈 앞에 마녀가 사라지진 않는다.
레가르는 의룡검을 손에 쥔 채 생각했다.
검면에 용비늘이 들어간 이 검이라면 헤르마니아를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만에 하나 자신이 사상 최강의 전사를 쓰러뜨린다면 본인의 무력은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헤르마니아는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악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때, 그걸로 나랑 해볼 셈이냐.”
“이건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물건이다. 가져가라.”
“귀여운 자식 엉덩이라도 차 줄까.”
“괜찮다. 나는 이만 가보마.”
레가르는 검을 넘긴 채 터덜터덜 지하 통로를 걸었고 그의 뒤를 수 많은 전사들이 따랐다.
의룡검을 손에 넣은 헤르마니아는 손가락 끝으로 검을 튕겼다.
띠잉.
찌르르하고 울리는 검명은 누가 보아도 명검이라 할 만한 무기였지만 헤르마니아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의뢰를 받을 걸 그랬나.”
의룡검을 다뤄보니 사막에서 성배를 찾는 게 더 유익하지 않았나 싶다.
“그냥 녹여서 악세사리로 만들까.”
의룡검을 노리던 전사들이 들으면 피눈물을 흘릴 발언이었지만 의룡검은 의뢰인의 손에 들려줄 생각이다.
이번 일의 의뢰인은 지하 벙커에 숨어 사는 노괴였다.
무기를 따로 빼거나 하면 길길이 날뛸 것이고 뇌 밖에 없는 그 녀석이 날 뛴다면 재밌을 거 같지만 해결사라는 직업 투명성에 문제가 생긴다.
순순히 의룡검을 넘기기로 한 그녀는 다음 의뢰를 찾아 나섰다.
하얗게 불태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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