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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용으로 쓰는 소설마저 퓌폐맛이네

몰?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2.04.03 17:19:54
조회 30 추천 0 댓글 0

출혈소녀


프롤로그


  이선 시에 비가 내렸다.


  오염지구의 비는 짙은 독성으로 흩뿌렸다. 시들어버릴 잡초조차 나지 않는 돌길 위로, 나는 보급품 바구니를 품어 안고 묵묵히 걸었다.


  위를 바라보면 하늘은 마스카라 빛깔로 어두웠다. 그러나 빛이 들지 않는 거리에서도 내 시야는 또렷했다.


  서예린.


  각성 전부터 선천적 초능력을 타고난 괴물이자, 번역소설 '라스트 맨 폴른' 속 최악의 빌런.


  지금 나는 그녀의 몸을 쓰고 있으니까.


  '라스트 맨 폴른'은 딱히 진지하게 읽은 소설은 아니었다. 그냥 초반부를 조금 읽다 말았을 뿐.


  관심을 가진 이유도 비교적 단순했다. 영미권에서 나온 히어로물인데 현대 대한민국이 배경이라서.


  진짜 대한민국은 아니고 대충 그런 척하는 모호한 배경이라지만, 이역만리에서 쓴 한국 배경의 히어로물은 자연스레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번역소설답게 문장은 엉망이었고 가끔은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오역도 있었다. 읽다가 그걸 못 견뎌서 집어 던졌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꾹 참고 끝까지 볼 걸 그랬다.


  전생의 내 이름은 박성현.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폭발에 휘말려 죽었다. 화재가 난 걸 기억하니까 아마 가스 폭발에 직격당한 거겠지.


  아프고,


  갑갑하고,


  피가 아주 많이 흐르는 죽음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하필 예린의 몸으로 눈을 떴는지도 모른다.


  원작의 서예린은 측정불가 수준의 출력을 휘두르는 혈액 능력자였으니까.


  상념에 빠진 사이 나는 셸터에 도착했다. 침식 이전에는 대형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지만, 이제는 의료 장비도 약품도 써먹지 못했다.


  셸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오염지구에 적응한 돌연변이들. 평범한 사람에게 쓰는 약이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몰랐다.


  그들에게서는 늘 피와 고름의 냄새가 났다. 예린은 초능력 덕에 아프지 않았지만 대신 그들을 홀로 돌봤다.


  정부는 오염지구 시민들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살극을 벌이기에는 국제사회의 눈치가 보였고, 인도적 지원이라는 미명 하에 무인기로 식량을 공급했다.


  예린이 주로 하는 일이 보급 포인트를 순회하는 것이었다. 비록 양이 점점 더 줄어들고는 있으나 셸터 하나를 먹여 살릴 만큼의 물자는 왔다.


  아지트로 쓰는 응급실에 도착하면 경계 이후에 안도와 환영이 잔잔히 퍼져나갔다. 이곳 셸터에서 실질적으로 수색을 맡을 수 있는 인원은 예린 하나뿐. 남녀노소가 제각각인 마흔한 명의 생명이 예린에게 달려 있었다.


  예린.


  뒤섞인 기억 속의 그녀는 이타적이고 친절한 아이였다.


  오염지구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병사, 아버지는 괴수의 습격으로 열살 때 사망했다. 그랬음에도 그녀는 불행에 빠져 있지 않았다.


  명랑하고 누구에게나 잘 하고 싹싹한 그런 여자애. 대형병원 셸터의 유일한 희망이자 버팀목인 소녀. 그게 지금의 예린이었다.


  홀로 천만이 넘는 인구를 학살했다고 하는 원작의 서예린은 여기 없었다. 어떻게 예린 같은 아이가 그렇게 비인간적인 길을 걷게 된 걸까.


  보따리를 끌러 통조림을 내려놓으면 가장 먼저 아이들이 달려왔다. 나는 예린의 기억속에 남은 그애들의 이름을 불렀다.


  "서준아, 영웅아. 혀... 누나가 뭐라고 했어요?"


  "...차례를 잘 지켜야 한다구요."


  "응. 조금만 기다리렴. 금방 나눠줄게."


  나는 암묵적인 보급 순서대로 식료품을 나누어준 뒤 병을 심하게 앓는 남자의 배설물을 처리했다. 이상하게도 예린이 된 뒤로는 이런 일에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저 매일매일 보아온 일상적인 풍경, 정도라는 느낌.


  그 외에도 이런저런 잡일들을 예린은 도맡아 했다. 그녀는 셸터의 수색대이자 경호원이자 간병인이었는데,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무겁다거나 과하다거나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단지, 이것이 그녀가 평생 살아온 방식이었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건강이라는 축복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래서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요컨대,


  오염지구 시절의 예린에게는 소명이 있었다.


  부정적인 사람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할 환경이지만,


  예린은 셸터의 모두를 가족처럼 사랑했다.


*


  예린의 소명을 오래도록 지켜주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고통스러운 일생을 겪은 끝에 빌런으로 전락하는 최후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성.


  예린의 잠재된 초능력인 혈액조종을 터득하는 것.


  그게 최우선의 목표가 되어야만 했다. 각성하지 못한 예린은 기껏해야 몸이 좀 튼튼한 여자애에 불과하니까.


  원작에서는 잠재력을 갖춘 인간이 특정한 감정을 느낄 때 초능력이 발현된다는 설정이었다.


  각성의 조건이 되는 감정은 다양했다. 히어로 협회는 각성을 위해 필요한 감정을 '열쇠'라고 불렀다.


  원작 주인공 최시후의 경우 열쇠는 '생존본능.' 가장 일반적이고 흔해서 30%를 차지하는 빈도의 열쇠.


  슬럼가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괴한의 습격을 받고 죽기 직전에 초능력을 각성한다.


  잠재력이 높은 초능력자일수록 각성에 필요한 감정 또한 더 강렬했다.


  최시후는 정말 생의 저편이 보이고 나서야 발화능력을 각성하고, 제어되지 않는 상태에서 괴한들을 모조리 태워 죽였다.


  이런저런 기연을 얻기 전 최시후 본인의 출력은 감마급. 감마급 능력자의 각성이 그정도의 열쇠를 필요로 한다면 알파급인 예린은 어떨까.


  비슷하게 생존본능이 열쇠라면 아예 한 번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 예린의 능력으로 가장 유명한 게 죽음에서 돌아올 정도의 재생력이니.


  생존본능 다음으로 흔하다고 언급된 감정은 증오. 그 다음에는 굶주림, 질투, 모멸감 등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나열된다.


  희생정신이나 사랑처럼 긍정적인 감정이 열쇠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긍정적 감정이 부정적 감정만큼 강렬하기는 어려우니까.


  이래서 원작을 좀 더 읽어야 했다. 스포일러에 따르면 예린은 마지막까지 주인공과 대립하는 빌런이라서, 그정도 역할이면 중간에 과거사도 묘사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라스트 맨 폴른'은 기본적으로 피카레스크 지향의 소설. 비중이 높은 악역이라면 대개 과거사도 함께 묘사됐다.


  각성의 열쇠가 무엇인지 안다면 빨리 강해져서 모두를 지킬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예린이 원작에서처럼 빌런으로 전락하진 않을 텐데.


  아무리 고민해봐도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서 주위를 둘러봤다.


  서준이라는 아이는 내 곁에서 잠들어 있었다. 부모가 둘 다 죽은 아이였고 얼굴에는 끔찍한 고름자국이 가득했다. 마치 천연두처럼, 벌레의 알이 다닥다닥 붙은 듯한 외형.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다들 그와 비슷했다. 외형이 비교적 멀쩡한 중년의 남자조차도 사지가 기이하게 뒤틀려 혼자 일상생활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예린만이 홀로 아름답고 이질적이다. 아직 각성하기 전이라서 그런지 머리와 눈의 색은 평범했지만 외모는 원작에서 묘사되던 그대로였다. 전 지구에서 천만 명을 학살했는데도 팬클럽이 있을 정도의 외모.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저 멀리에서 무언가의 움직임이 감지됐다. 괴수일까? 아니면 다른 생존자 무리?


  대형 병원은 오염지구의 외곽에 위치해 비교적 안전했지만 그렇다고 괴수의 습격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서준을 조심스럽게 옆에 눕힌 뒤 평소에 무기로 쓰는 도끼를 손에 쥐었다.



----


이러고 다음화 '파이어펀치'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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