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해두었던 논문을 인쇄하려고 내려간 중앙도서관 지하 1층에서 또 배유주를 만났다. 유주는 날 발견하고서 생긋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만 마주 흔들어줄 생각이었는데 대화가 걸렸고 어찌어찌 휘둘리다보니 학교 카페까지 둘이서 갔다. 우리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각자 한 잔씩 주문했고 조각 케이크라도 먹을래요, 묻는 유주에게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빨대로 커피를 한 모금 쭉 빨아먹은 유주는 내게 호감을 표하는 이유를 말했는데, 그건 의외로 아주 사적이고 고백적인 종류의 이야기였다.

  “우연 씨 얼굴을 그냥 보려니 뭔가 속이는 거 같아서, 다음에 보면 꼭 말해야지 했네요. 저 사실 여자를 좋아해요. 아니 정확히는 여자도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요.”

  “앗, 네.......”

  “그, 우연 씨한테 사심이 있거나 한 건 아니에요. 지금은 남자친구도 있고. 그냥 그렇단 얘길 하고 싶었어요. 우연 씨라면 괜찮을 거라고 믿어서.”

  “네에....... 꺼내기 쉽지 않은 이야기였을 텐데 저를 믿어주셔서 고맙고...? 저를 왜 믿어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간단한 결정은 아니었을 거구요...? 으. 제 반응 뭔가 이상하죠. 제가 이쪽 이야길 직접 듣는 건 처음이라.......”

  내가 우물쭈물 거리면서 커밍아웃에 응답하는 전형적인 레토릭을 주워섬기자 유주는 또 웃었다.

  “아하하. 다른 분이라면 몰라도 저한테는 그렇게까지 진지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 저도 . 그냥 예쁜 여자들을 동경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래도요. 좋아했던 여성분은 있었을 텐데.”

  “있었죠. 고등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였는데 어쩌다보니 고백까지 했어요. 나쁜 애는 아니었지만 동성애자는 더더욱 아닌 애였고. 뭐, 짐작하시겠지만 걔한테는 제 고백이 평생의 자랑거리나 됐죠. 나 여자한테도 고백 받아본 적 있다, 쯤 되는. 본성은 착해서 소문을 내거나 하진 않았지만요.”

  대화가 너무 깊은 수준까지 흘러가는데도 나는 그걸 막지 못했다. 유주의 웃음은 부드럽고 너그러워서 그런 그녀가 나를 훼손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웃음 뒤에는 그녀에게도 하나의 삶이 있으리라는 것, 그 삶은 절대로 단순하거나 평면적이지 않으며 미움도 사랑도 모두 있으리라는 것, 현실의 사람이란 순수하게 선할 수 없다는 걸 다 알았지만 어쩐지 그냥 믿고 싶었다. 나는 우연이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진실을 그녀 앞에서 말했다.

  “유주 씨, 제가 남자였다고 말하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물론 이게 실제로 백합.은 아니지만

유사백합이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는 인간이 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