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었다. 안방에 있던 아빠가 알콜중독자다운 얼굴을 하고 거실로 나왔다. 칼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시계바늘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번갈아가며 났다. 평범한 하루였지만 우연은 고야의 그림 속에 들어온 것처럼 숨이 막혔다. 폭발물이 점화되고 마침내 터지기 전까지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 지금이 바로 그런 시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이놈의 집구석’에 대한 한탄을 내뱉었고 아빠는 인상을 썼다. 혼잣말인 척조차 하지 않는 길고 긴 불만들이 계속 나열되었다. 우연은 아빠와 엄마의 시선 사이에 서서 그걸 들었다.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은 손에서 놓기 전까지는 터지지 않는다고 했다. 우연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랬다. 이미 핀이 뽑힌 수류탄을 손에 쥔 채 전전긍긍 하는 상황. 하지만 열세 살에 불과한 우연에게는 폭발물 처리를 위한 지식이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쑥 열어버린 입은 코앞에 떨어진 수류탄과 같았다.

  “어... 엄마. 그만 해.”

  “왜? 너도 엄마가 하찮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도 이 씨 집안 아니랄까봐 아빠 역성을 들겠다는 거지. 아빠가 목소리 크고 무서우니까 그러겠단 거지. 세상 어디에도 애기 때부터 너처럼 이기적인 애는 없을 거다. 내가 어쩌자고 연이 너 같은 애를 낳아서.”

  “...그럼 안 낳았으면 됐잖아. 나도 이딴 집에서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이딴 집? 너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그게 널 키운 사람한테 할 말이라고 생각해?”

  “그.......”

  “변명하지 마! 연이 너도 엄마가 우스운 거잖아. 엄마가 우스워서 이딴 집이니 어쩌니 하는 거잖아. 태어나기 싫었으면 차라리 죽어. 옥상에서 떨어지든 뭘 하든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엄마가 거기까지 소리쳤을 때 거실 소파에 앉은 아빠는 ‘그만해라’라고 경고했다. 음고는 낮게 내리깔렸지만 성량까지 작지는 않았다. 그 말이 촉매가 되어 엄마는 비명을 지르듯이 아빠한테 악을 썼다. 아빠는 엄마에게 쌍욕을 해가며 맞받았고 우연은 도망치듯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워 귀를 막아도 부모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생생하게 파고들었다. 우연은 정말로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죽고 싶지 않았다. 이 집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두려웠다.

  그날 새벽에는 부부싸움이 크게 있었다. 잠들었던 우연은 집기가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서 깼다. 밖으로 나가보면 엄마 얼굴에는 멍이 들었고 아빠는 엄마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엄마는 말기의 암환자처럼 신음하며 우연을 애타게 찾았다. 빨리 경찰을 불러 달라고. 이대로는 죽을 것 같다고.

  온갖 감정들이 가슴 아래에서 맞부딪혔다. 자기에게 죽어버리라고 한 엄마도 그만큼 고통 받았으면 좋겠다는 비열함. 경찰을 불렀다가 자기까지 얻어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어차피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며 돌아가버릴 경찰들에 대한 불신. 그 혼란 속에서 우연의 몸은 굳었고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는 게 한계였다.

우여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