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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쓰던 이윽고 네가 된다 팬픽도 딱 여기까지가 에너지 한계

몰?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2.03.26 17:55:14
조회 256 추천 0 댓글 4



[이윽고 네가 된다] 예쁘게 시들어가고 싶어 너와


  스물넷, 토우코는 무명 시절의 실패담도 하나 없이 이름난 연극 배우가 됐다. 뭐든 곧잘 해내는 여자였으니까 당연하다는듯 '축하해, 이제는 명실공히 주연급이 됐네'라며 넘겼지만 그녀가 덥석 안기면서 어리광을 부렸다. 심드렁해하지 말고 좀 더 영혼을 담아서 칭찬해보라고. 그녀의 자기자랑이 영화과 여대생들의 동경에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툭 내뱉었다.


  "그치만 토우코는 워낙 노력파잖아. 토우코가 뭘 하든 믿고 있어서, 막상 성공을 전해들어도 감흥이 없는 걸."


  "엑. 태연한 얼굴로 그럴듯한 말을 하네."


  "그럴듯한 말이 아니야. 진담인데."


  말을 마치자 토우코는 생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전등 빛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비추며 하얀 반사광이 위로 맺혔다. 넥타이가 살짝 풀린 정장 와이셔츠 차림에 흰 목덜미가 윤기나는 생머리 사이로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목선에 그대로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쯤, 토우코는 에둘러 시선을 피하면서 새 작품에 대해 알려줬다.


  연극 제목은 <비평가>. 비평가의 인정을 갈구하는 화가와 화가를 위해 더더욱 가혹한 평가를 내리는 비평가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깊이에의 강요>를 희곡으로 각색한 작품이라고 했다. 처음 듣는 제목이었지만 같은 작가의 <콘트라베이스>는 읽은 적이 있다. 인정욕과 사랑에 굶주린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모노드라마.


  "원작과 달리 비평가와 화가 모두 레즈비언이라는 설정이야."


  "그거 대담하네. 일본에서."


  "응. 대담하지, 일본에서. 나는 주인공인 화가 역. 젊은 여배우가 필요한 배역이라 운이 좋았어."


 "토우코라면 운이라기보단 역시 노력이겠지만."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근본적으로 잘난 주제에 노력까지 하는 재수없는 사람."


  "욕이니 칭찬이니."


  "당연히 둘 다야."


  토우코라는 사람은 늘 그런 식이었다. 머리도 좋고 미인인데다 스타일도 대단한 사람. 그만큼 타고났으면 그만인데, 계속해서 노력해나가는 사람. 내가 아닌 모두가 그녀를 동경했고, 나는 단지 동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린 특별한 관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는 유우야말로 노력파잖아. 고등학생 땐 수학을 제일 못했으면서 대학원은 통계로 갔고."


  "통계로 간 건 아니야. 인구사회학 전공인데 통계를 주로 쓰는 연구실일 뿐."


  "아무튼."


  "글쎄. 수학은 별로라도 손에 잡히는 건 열심히 하니까. 수리통계도 하다보니 어떻게든 되더라. 계산은 프로그램이 대신 해주기도 하고."


  한 번 집중하면 빠져드는 성격은 대학에 가서도 여전했다. 어쩌다보니 소프트볼을 배우고, 어쩌다보니 학생회에 들어가고, 어쩌다보니 토우코의 연인이 된 것처럼. 어쩌다보니, 라는 생각으로 한 번 손을 대버리면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는 기질. 토우코가 아니라면 '특별하다'는 감각 같은 건 여전히 없어서, 그녀와 있을 때를 제외하면 무심결에 뭐든 해버리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 유우."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토우코가 나지막히 불렀다. 그녀의 입가에는 세상 무구해보이는 미소가 환하게 걸려 있었다.


  "응?"


  "미리 말해두는데 원작은 읽어봐도 소용 없을 거야. 각색하면서 내용이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그래? 뭐가 다른데?"


  "비밀. 직접 와서 봐. 표는 특등석으로 구해 줄게."


*


  취업을 한 동기들과 만나면 돈이나 투자 이야기가 연일 화두였다. 나스닥의 우상향을 믿기에는 양적완화가 너무 오래 지속됐고 테이퍼링이 거의 확실시 된다는 둥, 파생상품에는 손을 안 댔지만 지금이라면 옵션거래 시장에 진입해볼만 하다는 둥. 나로서는 제대로 관심도 두지 않았던 세계의 이야기가 사정없이 쏟아졌다. 왜 돈이 필요해, 하는 멍청한 질문을 하면 무슨 소리냐며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집을 사고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아야 하니까.


  '하우스푸어'라는 부정적인 신조어가 잠깐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고 자고 먹고 사랑하기 위해서 삶을 저당잡혀야만 하는 사람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점점 더 예속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사회. 애정의 진동이라는 건 유가증권 차트의 등락이나 토지 실거래가의 파고에 비하면 사소하게만 느껴져, 세상의 숫자들은 아무리 가볍더라도 한 사람의 인생을 눌러죽일 무게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전체로 본다면 먼지 한 톨만한 돈이 한 명의 개인을 누를 때는 붕괴하는 크레인 같겠지.


  그 모든 이야기들이 내게는 한여름의 백일몽처럼 실감없이 다가왔다. 결혼을 할 일도 아이를 낳을 일도 영영 없을 것이 분명했기에. 하지만 차마 그애들의 면전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자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여자일 거라고, 그러니까 아이니 결혼이니 내게 허락되지 않은 삶의 이야기를 하는 건 그만두라고 따지진 못했다. 삶을 저당잡힌 사람과 저당잡힐 삶조차 없는 사람, 둘 중 어느 쪽이 더 불행한 건지는 아무래도 모르겠어서.


  "유우답지 않네. 그런 고민을 다 하고."


  기껏 마음을 털어놓아도 토우코는 속 편한 말만을 했다. 그 태연자약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괜히 뚱한 목소리가 나왔다.


  "나답다는 게 뭔데."


  "유우는 힘든 일이 있어도 좀처럼 울지 않잖아."


  "그건 딱히 애정을 가졌던 일이 없어서 그래. 하지만 토우코와의 문제는 다르니까."


  "그런가?"


  "응. 토우코는 정말로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하필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여자라서 불행하다거나."


  "흐음. 유우는 그런 적 있나봐?"


  "으으... 역으로 묻지 마. 그래서 없어?"


  글쎄다... 하면서 말머리가 흐려졌는데도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없어. 사랑하는 사람을 학생 때 만난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니까'라고. 그치만 사랑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에게는 터잡을 곳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이를 낳을 수도 결혼을 할 수도 없는 우리들의 사이를 매개해줄 터가. 만약 토우코가 내게 질려버린다면 나는 혼자 잠을 자고 혼자 밥을 먹으며 쓸쓸하게 살아갈 것이다. 애초에 우리 관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유우. 내가 아는 언니 중에도 결국 남자랑 결혼한 언니가 있긴 했어. 사랑하지 않아도 가정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니까."


  "그것만은 싫어."


  "왜? 남자가 싫어서?"


  "아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순전히 이용하려는 거잖아."


  "이런 면에서는 은근히 순정파야, 유우는."


  "비웃지 마, 토우코. 우리는 법적으로든 혈연으로든 서로 아무 사이도 아닌 건데, 그게 하나도 안 두렵단 말이야?"


  "응. 난 그걸로 좋아."


  "그걸로 좋다니?"


  "그러니까 우린 연인이잖아.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될 수 있는 관계. 연인."


  토우코는 내 어깨를 가볍게 끌어 안으며 말을 마쳤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순정만화 속의 고백처럼 허망하게도 들렸고, 가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걸 부정하는 단어가 솟아 올랐다.


2.


  토우코가 아직 나나미 선배였을 때를 나는 기억했다. 자기를 좋아하지 말라는 무리한 요구를 내걸며 입맞춤을 해오던 선배. 그시절 선배는 내 사랑을 확인할 때마다 무정물처럼 텅 빈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곤 했지. 자기 같은 걸 좋아하면 안 된다는 떼를 써 가면서.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랑을 단념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면서도 늘 버림받지 않을까 하며 불안해했다.


  과거의 불안은 이제 사라졌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한 채로 남아 있었다. 친구들이 한둘씩 직장을 구하고 라이프 사이클에 대비할 때도 나는 평범한 미래를 희망하지 못했다. 일이나 공부에 열중할 때가 아니면 종종 바닥이 없는 수영장을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고, 어떻게든 계속 살아내지 않으면 곧장 아래로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가끔은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속으로 자문하기도 했다. 어쩌면 토우코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갖고 싶은 걸까, 하고. 단순히 물질적인 증거로써 가정을 원하는 거라면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이기적인 바람을 갖는 여자에게는 토우코 역시 환멸을 느끼고 말지도.


*


   무한정 이어지던 부정적인 생각이 유우, 하는 호명과 함께 끊겼다. 정신을 차려보면 모범생 타입의 미남이 우산을 접으며 싱긋 웃는 게 보였다. 깔끔하고 미니멀한 셔츠에 코트를 걸친 고교 동창 마키. 그는 점원에게 원두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내 테이블에 와서 말을 걸었다.


  "심란해 보이네."


  "응, 그러네. 와 줘서 고마워."


  대학을 졸업한 마키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자동차 회사의 직원이 됐다. 마키라면 보다 예술적인 분야에 종사할줄 알아서 의외였지만,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거는 마키 쪽도 제법 잘 어울렸다. 어쨌거나 겉보기만은 흠잡을데 없이 성실한 청년이었으니까.


  "마키, 잘 지냈어?"


  "응."


  "그치만 요즘도 잔소리는 듣고 있지?"


  "그래. 부모님은 여전히 연애 좀 하라고 성화야. 내가 동성애자라고 오해하는 거 같기도 한데."


  흐음, 하고 팔짱을 끼면서 나는 마키를 삐딱하게 쳐다봤다. 확실히 그는 여자친구가 없는 쪽이 이상할 법한 남자였다. 여동생과 누나들 사이에서 자라 여자에게 익숙해진 남자. 여자에 익숙하고 그래서 여자를 대하는 법을 아는 남자. 마키는 외모까지 따라주니까 이성애자였다면 평생을 여자들 가운데에서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여자의 마음을 쉽게 이용해먹는 부류로 자랐을지도 모르고.


  "하긴, 마키는 아무래도 여자애들을 가지고 놀 거 같은 이미지라."


  "가지고 논다니."


  "인상만 그렇단 거야, 인상만."


  "그래도 좀 찔린다. 학생 땐 정말 남의 연애사로 장난을 쳤는데."


  "장난인가? 마키라면 꽤 괜찮은 상담 상대였던 걸?"


  "아냐. 선의가 있다 해도 남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욕심을 채웠던 거잖아. 아직 어려서 나쁜 짓을 했던 게 맞아."


  "윽. 남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라......."


  "왜?"


  "으, 그냥 어리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나나미 씨 얘기야?"


  "...응."


  잠깐, 침묵.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마키의 커피가 나왔고 나는 카페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적당히 씁쓸한 원두의 향 위로 은은하게 달콤한 우유 맛이 섞였다. 창밖을 바라보면 겨울비가 가볍게 흩뿌렸고 창을 타고 내리는 물방울 속으로 도시의 불빛이 이지러졌다. 그리고 불빛 사이로 흘러가는 너무나 많은 행인들의 걸음이 있어서, 그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떠안은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인구통계를 다루다 보면 이따금 개인에 대한 관념이 희미해지고는 했다. 총무성 자료상 일본의 인구는 1억 2천 6백만 명쯤 되었지만 그게 일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 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들과 속지주의니 속인주의니 하는 국적법 규정상의 예외들, 그리고 서류상으로만 등록되어 있는 장기 거주불명자들이나 사망 처리되지 않은 실종자들. 그런 유령인구의 숫자는 한해에도 수십만 명씩 오르내릴 수 있었고 서류더미 속에서 1인은 더해져도 빠져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데이터였다.


  그 의미 없는 1인이 마시는 카페 라떼의 맛은 물론 고소했고 실내 온도는 훈훈했다. 하지만 내 모든 감각들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상상, 언제든 사라져버릴 수 있는 유령인구처럼 나 자신도 사라지게 되는 상상을 할 때면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 갇힌 것처럼 아득해졌다. 충돌의 시점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망망대해로의 낙하.


  "유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그게......."


  "그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저 막연히 불안해서."


  "불안한 거야? 뭐가? 나나미 씨의 마음이 변할까 봐?"


  "그... 런 점도 물론 있지만. 그게 본질은 아냐."


  "그럼?"


  "사실은 아무 문제도 없는 게 맞겠지. 토우코는 프로 배우로 정착했고 나도 취업길이 괜찮은 공부를 하니까. 벌써부터 노후를 걱정할 이유도 없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어. 하지만 인생이 그럭저럭 풀리고 있는데도 어쩐지... 어쩐지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어째서?"


  "아마 나는 토우코와의 문제라면 바보가 되나봐. 특히 동기들이 결혼과 집 이야기를 할 때면 그걸 견딜 수 없어져. 구애되고 싶다는 욕망이라도 생겨버린 건지."


  "흐음. 유우라면 자유로운 쪽을 선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난 나를 못 믿겠어. 토우코의 정이 식는 것도 걱정이지만 나 스스로의 마음도 걱정돼. 어쩌다가 사랑을 품어버렸듯 어쩌다가 다시 무정해질 거 같아서."


  "그렇구나. 나나미 씨하고는 얘기해 봤어?"


  "응. 근데 토우코는 아무래도 좋다는 투야. 나만 쫀쫀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랄까."


  곤란하다는 듯 살짝 찡그린 표정을 지은 마키는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며 기뻐하던 시절이 부끄러운지 굉장히 조심스러운 눈치여서, 나는 되도록이면 편안하게 웃는 얼굴을 했다.


  "그래서 마키, 네 생각은 어때?"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긴 한데, 남이 함부로 말을 얹을 주제가 아니라서."


  "괜찮으니까 뭐든 말해줘."


  "음... 네 기분 이해해, 하고 말하진 못하겠네. 유우. 너도 책을 많이 읽으니까 그런 순간은 알 거야. 고전이라는 작품들 속 인물의 탄생과 생애와 몰락이 모두 내 것이 되는 듯한 순간. 애틋한 사랑도 운명적인 만남도 이야기의 끝에 가서는 모두 정지한다는 예감. 난 그런 예감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어."


  "그래? 고등학생 때는 사랑하지 않아도 외롭지 않다면서."


  "지금도 외롭진 않아. 저 거리 바깥에서 예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행복해. 그러니까 이건 고독이니 행복이니 하는 단어들과는 무관한 거지. 그저 난 머리로 납득하고 있는 거야.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는 걸. 사람들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지만 끝에가서는 모두 실패하기 마련이란 걸. 절대적이고도 마지막인 실패는 죽음이니까."


  "그럼... 그럼 마키는 그걸로 충분한 거야? 어차피 죽을 운명을 납득하겠다고? 병에 걸려서 죽어갈 때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괜찮아? 손발을 까딱할 수 없어서 욕창이 생기고 밥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채 홀로 죽어가도?"


  "응. 난 그래도 만족해. 하지만 네게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그렇게 절망적인 얘기가 아니야."


  "아니라면?"


  "어느 경제학자 말대로 장기에는 어차피 다 죽을 거야. 이번 세기가 가기도 전에 우리 모두의 숨이 사그라들겠지. 그러니까 불안하더라도 지금만을 생각하도록 노력해 봐.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나나미 씨를 더 많이 사랑하며 좋아하는 일에 몰두해 봐. 우린 다들 그런 식으로밖에 살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단기를 살도록 지어져 있으니까."


  "그걸로 정말 충분한 걸까?"


  "뭐가 충분한지는 나도 몰라. 사실 충분하다는 개념은 지구상의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글쎄. 결국 진부한 충고밖엔 해주지 못하겠네. 원의 둘레에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것처럼, 인생은 바깥에서 본다면 늘 시작이자 끝에 서 있는 거라고. 그 교차점을 현재라고 부르니까 현재를 사랑해야만 한다고."


3.


  마키와 헤어진 뒤 집에 도착하자 아직 잠들긴 이른 시간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문득 그가 인용한 말이 떠올라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장기에는'까지만 입력해도 나머지 부분이 자동완성되었고 관련된 문서 수도 적지 않았다.


   장기에는 우리 모두 죽는다. 그건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1923년 저작 <화폐개혁론>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라 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경제정책이 자연균형을 낙관해서는 안 되고 당면한 사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나. 경제에는 과문하다지만 대략 어떤 뉘앙스의 말인지는 촉이 왔다.


  특히 칼럼을 읽다 보면 케인스 개인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눈에 띄었다. 그가 양성애자이며 아이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미래를 저버렸다는 루머나, 현세적인 모더니스트였던 탓에 미래 세대를 착취했다는 험담들. 진보진영에서는 위대한 경제학자의 성적지향을 빌미삼은 저속한 데마고기라 비난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짧은 문장에 담긴 어떤 절망감이랄까, 아니면 숭고하다고는 해도 여전히 체념인 감정들이랄까. 아무튼 인간의 숙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과는 어딘가 다른 한계짓기가 느껴졌고 그래서 난 알 수 있었다. 그는 실제로도 미래에 무심한 심장을 가졌을 것이다.


  시간 앞에서는 어떤 상처도 기쁨도 평등히 씻겨나가리라는 것. 나 홀로 실패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실패하게 되리라는 예감. 비관적인 예감이었지만 왜인지 그 아래서 내 마음은 약간이나마 편해졌다. 사람에게는 영겁과도 같을 만큼 먼 미래에는, 끝끝내 이 우주마저도 얼어붙어 죽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한 사람의 실패란 아주 사소해지고 말겠지. 사소하고도 사소해서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못할 그런 실패.


*


  토우코를 더 많이 사랑하라는 조언을 들었지만 바로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초연 준비로 쉴 새 없이 바빴고 나는 나대로 논문 작성과 연구실 사무가 연달아 겹쳤다. 좀 쉬어가며 해, 하고 메시지를 남기자 '벌써부터 톱스타가 된 것마냥 굴어선 곤란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긴 유망하다고는 해도 아직 신인인 토우코였으니까, 주연작을 앞둔 차에 느슨해질 틈은 없을 거였다.


  목요일 점심에는 속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 사회대 건물을 나왔다. 평소라면 연구실 동료들과 식사를 했겠지만 어쩐지 그럴 기운이 나지 않았다. 상경관 오른편을 걷다보면 상록수가 무성한 숲길이 있었고, 나는 가로등 옆 벤치에 앉아 휴대전화를 꺼냈다. 겨울 해가 알싸해서 토우코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유우?"


  "응. 토우코, 바빠?"


  "지금은 안 바빠. 무슨 일 있어?"


  "그냥, 외로워서."


  그러고는 아무래도 좋을 잡담들을 토우코와 나눴다. 오늘 날씨나 하루의 경험처럼 작고도 명백한 것들.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내용을 담은 목소리인 말들. 그 끝에서 나는 짤막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좋아해."


  "나도."


  "좋아한다는 말 이상으로 좋아해."


  "그게 뭐야."


  "사랑 고백."


  "...술 마셨어? 아직 낮인데?"


  "읏... 나 진지해, 토우코."


  "미안, 미안."


 "토우코."


  "응."


  "토우코를 만나기 전까지, 난 내가 냉담하고 선천적으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


  "하지만 아니었어. 나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어. 가슴이 뛰고 두근거린다는 감각도. 곁에 누가 없으면 외롭고 쓸쓸하다는 감정도. 한 사람을 열렬하게 욕망한다는 기분도. 모두 토우코가 내게 가르쳐준 거야."


  그래서 걱정돼, 하고 이어지는 말들이 목청 아래에서만 맴돌았다. 나는 어쩌면 사랑하는 법을 배운 척하는 게 아닐까. 내 몸이 어느날 토우코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열망이 사라질 때도 신기루처럼 흩어져버리고 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우리 관계가 앞으로 어긋난다고 해도 누굴 미워하지는 않기로 했어. 실패를 미워한다면 이 세상 모두를 미워해야만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면 더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뭔가 부끄럽네. 미안하기도 하고."


  "어... 미안해? 왜?"


  "학창시절의 일은 항상 뉘우치고 있어. 아직 어렸다는 핑계를 대도 소용없겠지. 유우한테 제멋대로 다가가서는 다시 밀쳐내고."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야. 난 내가 좋을대로 유우를 이용했던 거야. 유우의 약점을 파고든데다가, 남의 삶 속에 들어선다는 일의 무게를 고민하지도 않았지."


  "..."


  "난 유우의 입장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유우는 날 믿고 변화시켜줬어. 유우가 아니었다면 난 한참을 언니의 그림자 속에서 헤매야 했을 걸. 유우의 그런 상냥함이 난 고마웠어."


  "그랬던 걸까."


  "응. 그래서 유우의 불안에는 나도 책임감을 느껴. 내가 그렇게 멋대로 굴었으니까 유우가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하고. 우리가 다시 변해서 서로 냉대하게 되는 훗날을."


  토우코의 마지막 말에는 울음기가 살짝 섞였다. 울어버리면 연기 연습에 방해가 될텐데, 생각하면서도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토우코가 자기 심정을 솔직하게 말해줬다는 만족감. 그리고 내 고민을 진지하게 생각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만족감.


  "그런 의미에서, 유우. 우리 동거하자."


  "엑. 느닷없이?"


  "느닷없진 않지. 안 그래도 유우가 불안해해서 동거를 생각하고 있었어."


  "그랬구나......."


  "게다가 앞으로 박사를 하든 취직을 하든 더 바빠질 거 아냐. 나도 맡는 배역이 얼마나 많아질지 모르고. 심지어 장거리 연애가 될 수도 있는데 그걸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많이 봐 둬야지."


  "그러네. 앞으로는 더 시간이 부족해질 거니까."


  "초연이 끝난 다음 함께 살 공간을 구해보자. 우리 조건 하에서 최대한 좋은 곳으로."


  "응, 약속하기다."


  "약속."


  통화가 끝나고서 나는 벤치에 기대며 토우코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했다. 세월이 흘렀다고는 표현해도 될 만큼의 미래, 조금씩 늙어가게 된 둘이서 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아마도 함께 야위어갈 것이다. 눈가에는 잔주름이 잡히고 매끄럽던 피부가 딱딱히 굳어갈 것이다. 매일 반찬이 비슷한 저녁식사를 하고 열기가 꺾여 시들해진 사랑을 하겠지. 그 상상은 어딘지 서글프면서도 역시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무심결에 그런 미래를 소망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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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158 t1 경기력 미침? [2]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31 0
1346157 광동이 게임을 접었구나 죄 악(110.11) 22.03.26 11 0
1346156 뭐지?이게밑바닥인생의현실? 덕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22 0
1346153 ㄹㅇ 내가 지금 플옵을 보는거냐 스너프필름을 보는거냐 [2] 목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126 0
1346152 ㄹㅇ 저 조만간 자살할거같은데 어캄 [5] 덕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69 0
1346151 광동 ㅅㅂㅋㅋㅋ 무슨 꽁트같네 덮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16 0
1346150 고슬 이거 ㄹㅇ 개뜬금없네 [8] 라비헤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73 0
1346149 걍 정글 서폿차인가? [1] 스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16 0
1346147 카츠리!!! [8] Lui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27 0
1346146 12분 4천차 14분 7천차 콜드오렌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14 0
1346142 여우 시발 저거 존나 비싼거잔아 ㅋㅋㅋㅋㅋ 모하비배달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49 0
1346139 저 쌀먹 망했음 재진입한거 다날려먹음 [1] 덕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43 0
1346138 구마유스ㅋㅋㅋㅋㅋㅋ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10 0
1346137 피케가 지금 부산에 있다니 루잭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18 0
1346136 여우야 300만원 먹었으면 피자 10판은 돌려야하지 않겟냐? 죄 악(110.11) 22.03.26 17 0
1346134 근데 330만원 만년필이 15만원에 나오는 과정이 ㅈㄴ 웃기네 ㅋㅋ 죄 악(110.11) 22.03.26 76 0
1346132 저 제정신아닌듯ㅋㅋ 덕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20 0
1346131 아니 먼 12분에 4천차이가 나냐 [1] 콜드오렌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14 0
1346130 3년만에 액정보호필름떼니까 좀 그렇네 [1] 궤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16 0
1346129 광동 걍 멘탈 나간거 같은데 ㅋㅋㅋ [2] 덮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30 0
1346128 재수학원근데ㄹㅇ왜케잘되는거지 Lui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23 0
1346127 여우가 갑자기 길에서 300만원을 줍는 동안 나는 방안에서 죄 악(110.11) 22.03.26 3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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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119 간츠E 이거 씨발 드림매치 뭐냐 ㅋㅋㅋ 팬픽이냐고 ㅋㅋㅋ [7] D4C서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107 0
1346118 방탈출 카페가 억지인 이유) 파타피도 가서 탈출 못했댓슴 [1] 피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65 0
1346116 음양사 근데 좀 웹소 주인공으로 매력적인 유형이긴 한데 [13] 몰?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7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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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112 이제는 누구턴? 녹턴 ㅇㅈㄹ ㅋㅋ 뉴구븽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1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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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106 요즘 드는 생각인데 마이너 언어 전공 << 이거 히트일지도 김해비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3.26 2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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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술 취해 5살 딸 데리고 무단횡단 한 아빠... 오은영 “끔찍” 디시트렌드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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