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제목은 거창해도 내용은 얇음
약간의 스포 o
1.
나는 장르 소설을 특히 좋아한다. 취향에 맞는다면 보다 소비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장르를 소비하다 보면 조금 다른 지점들을 마주치기 마련이다.
흔히들 장르-컨텐츠는 B급이라고도 불린다. A급 컨텐츠가 독창적인 어떤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라면, 그에 반해 그것을 지배하는 관습이나 규칙이 있는 것을 B급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예컨대 좀비 장르에서 좀비는 느릿느릿 할 수도 있고 빠릿빠릿 할 수도 있다. 멍청할 수도 있고 지능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좀비는 살아있는 생명체, 주로 사람을 감염시켜 좀비로 만든다는 것이 장르의 포기할 수 없는 규칙일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어떤 컨텐츠의 장르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좀비 장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라거나, 생존물인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앞서의 이야기와 종합할 때, 장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컨텐츠의 본질적 속성을 정한다기 보다는 그 작품에 붙어있는 태그들 혹은 코드들과도 같다.
2.
당연한 얘기지만, B급과 A급을 칼같이 나눌 수는 없다. 좀비 장르에 속하지만 정말 하려는 이야기는 좀비에 대한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는 기본적으로 추격전 장르에 속할 것이다. 우연히 돈가방을 발견하게 된 주인공과, 그것을 쫓는 사람의 추격전이 영화의 주된 플롯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추격전 장르에 국한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여기서 말하기엔 너무 길지만, 최소한 우당탕 쿠당탕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로 끝나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장르의 규약을 잘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독창적인 어떤 것을 주제로써 다루고 있는 영화인 반면, 당연히 지극히 장르적인 영화도 있다. <베테랑>이나 <극한직업>과 같은 K-형사물은 장르를 벗어나려는 시도라기 보다는 장르의 재미를 극대화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런데, 장르를 소재로 다루면서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려는 작품이 있고, 장르의 장점을 끌어올리려는 작품이 있다면, 장르 자체가 주제가 되는 작품도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굉장히 미묘한 부분이 있는데, 장르의 장점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그러한 장르적 방식으로서만 달성될 수 있는 독창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과 같은 작품이 그렇다. 미스터리 추리 장르의 규약을 낱낱히 파고들며 나아가 이 장르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신박한 고민을 던지게 만든다. 영화에서 찾자면 타란티노의 <바스타즈>가 그러한 예시일 터다.
3.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어떤 장르 컨텐츠가 그 장르 자체를 주제로 삼을 때, 가장 장르적인 것은 가장 예술적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장르는, 그 장르 자체를 언제나 문제로 삼는다는 것을 그 장르의 특징으로 삼는다. 세상에 그런 장르가 있다고. 내 생각에는 무협(武俠)이 그렇다. 나는 무협물을 좋아한다. 칼 한자루 혹은 주먹 두개로 능히 세계에 맞선다는 괴팍한 낭만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낡아빠진 만화방 구석에 때탄 채로 줄줄이 꽂혀있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른다. 무협은 분명 쇠퇴한 장르다. 장르소설계에서 무협물은 다른 장르와 결합되거나 소재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크게 성공하는 경우를 요즈음 찾아보기 어렵다.
무협이 천박한 농담이 되어버린 시대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무협이라는 장르를 정면에서 돌파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목마의 <천화일로>나 컵라면의 <무림서부>가 그렇다.
그 전에, 왜 무협이라는 장르는 그 장르 자체를 주제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장르인가? 그것이 정말 무협이려면, 단순히 내공이라는 신비로운 초능력이 존재하고, 정립된 무림의 모습을 어느 정도 따른다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협은 무(武)와 협(俠)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모든 탐정물이 '탐정이란 무엇인가'를 묻지는 않는다. 모든 좀비물이 '좀비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무협은 '무와 협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을 그것의 핵심적 구성요소로 지닌다. 그렇지 않은 것은 좁게 보자면 무협이 아니라 무협을 소재로 사용한 장르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서부극을 떠올렸다면 고마운 일이다. 서부극도 이와 유사한 점이 있다. 당연히, 총 한자루로 한 무리의 마적단과 능히 맞선다는 괴팍한 낭만때문은 아니다. 잘 만든 서부극이라면, '서부'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나름대로 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무(武)란 무엇인가? 작품마다 서술은 다르지만, 무는 틀림없이 어떻게(how)에 대한 논의이다. 한 인간이 엄청난 능력을 지닐 수 있는 장르적 허용이 있는 세계 속에서, 인물들은 강하다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강해질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끝없이 무를 추구한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정말 끝이 있는가 등에 대한 고찰이 무협에는 있어야 한다.
가령 <천화일로>와 같은 무협에서 무의 끝에 있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반영시키는 능력이다. 예컨대 칼 든 사람이 허수아비를 베어내려 할 때, 하수는 쇠붙이와 완력의 효능으로 그것을 해낸다. 중수는 내공과 정립된 무공의 힘으로 벤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는 자신의 의지 그 자체를 세계에 반영시킨다는 것이다.
목마 작가의 독특한 지점은, 이전 <쥐뿔도 없는 회귀>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이러한 무의 끝에 또 한 번 어떤 인식적 혹은 형이상학적 경계를 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비록 웃음거리가 되어버렸지만, 나는 그러한 경계를 넘은 이들이 한 데 모인다는 기믹을 무척 좋아한다. 목마 스스로 말하듯, 무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길이 끝내 한데 모이고, 그 맨 앞을 걸어가는 누군가의 등이 보인다... 뽕이 있지 않은가. 흔히들 무를 무궁(無窮)한 하늘을 향해 산을 오른다거나 탑을 쌓는다고 비유하지만, 무에 대한 논의로써 이보다 매력적인 이미지화는 없었다.
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무림서부>는 복고를 시도한다. <무림서부>가 매력적인 작품인 이유가 여기 있다. 글자로만 접했을 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무림이라는 세계에 대해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무가 단순히 가장 효율적으로 빠르게 상대를 죽이는 한 번의 칼질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상상으로만 무를 그려내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념비로써 그것을 복원해 내려는 장건의 시도는,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무협은 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하고 있다.
5.
맹자는 인의(仁義)가 있는 것은 권력이지만 인의를 잃은 것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무 역시 그렇다. 무가 협을 잃는다면 그것은 단지 초강력 폭력일 뿐이다. 그렇다면 협(俠)이란 무엇인가?
무가 '어떻게'였다면 협은 왜(why)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무가 그토록 대단한 것일지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허수아비든 사람이든 베어내는 방법이 아닌가? 왜 그것을 추구하는가? 무가 협을 잃고 협이 무를 잃어버린 세상이 아니라면 이에는 협으로 답해야 한다. 역시나 이에 대해 답하지 않고서는 좋은 무협이 될 수 없어 보인다.
어떤 무협의 인물들은 과감히 이 질문을 포기한다. 마치 어떤 이가 자신의 삶을 위대한 그림 하나를 그려내기 위해 바치기로 마음먹듯, 그리고 그런 이에게 왜 그런 그림을 그리냐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질문이듯, 무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답변을 포기함으로써 질문에 답하는 독특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설령 무 자체가 목적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금 정말로 그것이 목적이 될 수 있냐고 물을 수 있다.
어떤 도덕적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가 그러할 것이다. 무고한 어린아이를 죽이면 절세의 비급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죽이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무가 대체 왜 그런 짓을 해서까지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물을 수 있다.
협이란 이러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어떤 이에게 협은 의리에 대한 충성으로, 대의를 위함으로, 차마 그럴 수 없는 마음으로, 심지어 어떤 이에게 협은 구도(求道) 혹은 구도(救道)의 길로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는 모든 답변에 대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정말로 그것이 가치있는가? 하는 질문이 진지하게 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정말로 가치있는지는 베일에 쌓여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한 마디로, 협에는 답이 없다.
그런데 무협이라는 장르의 중요한 특징은, 앞서 이야기한 '어떻게'에 대한 논의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왜'가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극히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에 어떻게 답하느냐가 무협의 방점을 찍는다.
나는 <천화일로>가 탁월한 점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고금제일의 고수인 혁월운은 '어떻게'에 있어서 정점에 선 인물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왜'라는 질문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이 그토록 막대한 능력을 지닌 것 자체가 세계의 부조리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세상의 모든 '왜'를 지워버리려 한다. 왜? 그가 그러기로 결정했고,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질문에 답변을 포기하는 것을 넘어 질문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이제 <천화일로>의 주인공들, 아니 모든 존재자들에게 남은 것은 '어떻게' 혁월운이라는 의인화된 재해적 운명을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혁월운은 그들이 '왜' 자신을 막는지, 혹은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지에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 자신을 막을지에만 호기심을 가질 뿐이다. <천화일로>가 가진 서사적 구조는 이처럼 한 바퀴 순환하는 물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무협으로써 <천화일로>의 하이라이트는 혁월운과 맞서기로 결정한 이들이 앞으로 한 발 내딪는 장면이다. 이는 혁월운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다. 자신들의 '왜'를 답함으로써 맞서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협이란 무엇인가? 왜 무를 얻으려 하는가? <천화일로>에서 말하는 그 답은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이다. 말도 안되는 운명에 마주했을 때,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먼저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천화일로>의 협이다. 무는 그것을 의미없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협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두 가지 질문이 될 수 있다. 하나는 무협이라는 장르에서 협이 어떻게 다루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고려는 곧바로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현실에서 이러한 선택의 기로가 주어진다면,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협에 대한 좋은 답변은 첫 번째를 통해 두 번째의 질문까지 포괄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질문에 답하는 가장 예술적인 방식은, 가장 장르적으로, 무협이라는 장르를 통해 답하는 것이다.
6.
<천화일로>는 매력이 많은 작품이다. 무협의 코드와 판타지의 코드를 적절하게 섞어 만들어낸 세계관, 시그니처에 가까운 유쾌한 입담의 주인공, 트로피가 아닌 입체적 인물로서 자신의 입지를 찾아가는 여성 캐릭터들, 역시나 시그니처에 가까운 어떠한 초월적 위기에 처한 세계와 그로 인한 코스믹 호러를 불러일으키는 압도적인 적들...
그러나 나는 <천화일로>의 제일 가는 점을 꼽으라면 이처럼 무와 협에 대해 정면으로 그러나 세련되게 돌파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익명의 비평에서 이미 지적되었지만, 사족으로, 이러한 무와 협에 답하는 서사적 구조에서 인물들의 주된 감정선은 억울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다. 어째서 세상은 이토록 위기에 처해 있는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천화일로>의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감정적 힘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만이 억울한 점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억울해야 마땅하다.
주인공 위성천만이 지닌 억울함은 왜 자신이 이러한 운명에 맞설 또 다른 운명적 존재로 낙점되었냐는 것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적자의 운명을 져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왜 자신이며 그로 인해 왜 자신의 가족들은 이러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앞서의 모두의 억울함은 혁월운을 쓰러트리고 세계의 위기를 해결으로써 해소된다. 조력자인 천인 무연준, 인연이 없는 영웅의 억울함은 새로운 인연을 얻음으로써 해소된다. <천화일로>의 감정적 매력은 이처럼 각 인물의 억울함을 나름대로 해소해 준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위성천의 억울함도 해소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천화일로>의 마지막 적이 혁월운이 아닌 위성천의 형 위성열인 이유이다. 자신의 형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것, 형의 마지막이 괴물로써가 아닌 자신의 형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위성천은 위로받을 수 있다.
1) 장르 컨텐츠는 때때로 장르 자체를 주제로 삼으면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
2) 무협은 장르 자체를 주제로 삼는 독특한 장르다.
3) <천화일로>는 무협이라는 장르의 재미를 극대화함과 동시에, 장르 자체를 주제로 삼는다는 특징을 매력적으로 풀어낸다.
4) 네이버 시리즈에서 볼 수 있다.
목마와의 짧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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