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다영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 (2023)
일직선의 시공간 축을 묶어 ‘시점’을 ‘시선’으로 바꾸고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이야기들이 담긴 단편집. SF를 기본으로 환상과 신화적 요소를 많이 차용함. 기존의, 밤의 조용한 바닷가를 걷는 분위기를 지나 커튼 사이로 부옇고 진한 햇살이 비치는 듯한 분위기로 나아간 문체가 유달리 인상적임. 여러모로 한층 더 부드러워지고 한층 더 단단해짐. 순수 필력의 성장이 눈에 훅 들어옴.
어쨌든 감성소프트SF라는 거 아님? 음... 하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소프트라고 하기에도 어렵고 감성도 흔히 생각하는 그런 ‘안전한 포근함’이 아님. 우다영만의 작품 세계를 구성해 온 핵심 키워드들, 그러니까, 관계의 흐름에서 분명히 보이나 보이지 않는 작은 ‘징조’(1화 – ‘밤의 징조와 연인들’ 참조), 생각과 방향에 따라 달리 펼쳐질 수 있는 ‘다차원’(2화 –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참조), 겹겹이 쌓아 올린 현실과 환상 속 ‘의미’와 ‘무의미’(2화 – ‘북해에서’ 참조) 등을 통해 그동안은 거대한 세계관을 구축하려 했다면, 이번에는 그것들을 바탕으로 ‘세계’가 아닌 ‘인간’에 더 초점을 맞추려 했다고 할 수 있음.
붕 떠 있던 환상적 흐름을 조금은 땅에 부착시키려 했기에 필히 존재론적 고찰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말은 작가에게 SF란 지적 사유 수준을 한층 더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한 요인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임. 어떻게 보면 여타 작가들의 소프트 SF와 크게 다를 게 없으나, 현실을 비춰내는 또 다른 거울로 활용한 감성소프트SF와는 활용 공식이 다름.
어쨌든, 어쩌면 이 책뿐 아니라, 그동안 작가가 표현하고 싶어 한 모든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문학적 허용이 바로 SF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이야기와 SF가 찰떡같이 어울림. 사유의 정도와 더불어 작품 전체의 핍진성과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고안한 방식으로 SF가 스스로 선택된 게 아닐까 하는 역진성까지 느껴짐.
내용을 보면, 앞서 말했듯 ‘경계를 허무는’ 이야기임. 물론 이는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많이 보아온 것이지만, 그동안 읽은 SF에서는 성별이나 종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가 대부분이었음. 하지만 이 책에서 우다영은 한 인류로서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것에 집중함. 게다가 전작 ‘앨리스’에서 다차원을 만드는 방법으로 단순히 시간 축을 비트는 것만을 보여줬는데, 이제는 시공간 축을 아예 하나로 묶어버림. 그렇기에 그 안에서 ‘철저한 개인’은 없다는 것, 너와 나, 우리는 사실 인연을 반복하기 위한 운명 속 동일인(동행자)일 수 있다는 것을 도출해 내고, 과거와 미래라는 시점을 ‘흐르는 현재’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하나의 시선으로 바꾸어버림. 마치 불교의 윤회처럼 보이기도 하고 문득 영화 ‘컨택트’가 생각나기도 함.
또한 경계는 인간만이 아닌 세계를 향하기도 하는데, 작품 분위기가 인간(나)이 인간(인류)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와 인류가 세계의 뚜렷한 테두리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로 나뉘기 때문임. 하지만 이쪽 세계(나)에서 저쪽 세계(너)로의 관념적 경계를 허무는 이야기든, 종말이라는 고정된 미래를 바꾸기 위한 해결책으로 과거를 헤매는 이야기든, 결국엔 고착된 사고를 뒤집어 모든 걸 선이 아닌 원으로 잇는다는 점에서 서로의 선을 허문다는 건 곧 세계의 시점이 시선이 된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됨. 즉, 세계보다 인간에 초점을 맞췄으나 역설적으로 인간과 세계 사이의 경계까지 허물어 하나로 엮었다고 할 수 있음.
여기서 경계를 허물고 벽을 부수는 주요 능력으로 ‘각성’이 나타나는데, 이는 초능력적 특이점보다는 사고의 확장으로 인한 깨달음 전체라고 보면 될 듯함. 실제로 인물들이 도달하는 질문은 ‘왜 우리는 누군가를 애호하고 누군가를 혐오하는가’임.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종말의 원인은 직접적인 전쟁이나 기후 위기가 아닌 그 뒤에 숨어 있는, 서로가 철저한 타인이 되어 서로를 철저히 미워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끝내는 ‘축적된 정보의 패턴을 나침반 삼아 과거로 미래를 비춰보는 길’을 모색함으로써 마침내 해답이라 ‘할 만한’ 걸 제시함. 이를 적당한 선문답이나 각성이라는 단어로 손쉽게 대체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이게끔 노력해서 분명히 어려운 내용임에도 곰곰이 곱씹으면 끄덕이면서 책장을 넘길 수 있게 만듦.
‘패턴’ 역시 중요한 키워드인데, 주로 과거로부터 축적된 정보를 하나의 패턴으로 엮어 미래를 보는 것으로 많이 활용됨. 더욱이 정보라는 걸 문명의 흐름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반복되는 삶을 통한 영혼의 교류까지도 포함해서,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을 수치화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을 깨닫고 각성으로 나아가는 동기로 활용함. 여기서 잠깐, 과거와 미래가 데칼코마니라면 현재는? 가운데 중심선 혹은 그림을 그려가는 궤적 자체가 아닐까 싶음. 전자로 본다면 현재는 각성의 순간을 뜻하는 게 되고 후자로 본다면 더 이상 시제를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어짐. 즉 패턴 파악에는 각성을 통해 시제를 없애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임.
이렇듯 얼핏 보기엔 전작들과 크게 다를 거 없는 추상적인 사유의 흐름과 메시지가 SF와 기가 막히게 조화되어 추상적인 개념이 초월적으로 해석되고 무게감을 획득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지반에 내려앉아 떠내려가지 않게 됨. 표현은 부드러우나 담고자 하는 바는 묵직하니... 가히 발전하고 진화하는 작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SF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임. 일례로 수록작 ‘긴 예지’는 놀라운 흐름으로 진행되다 갑작스럽게 ‘신’을 들먹이는데 이는 본인만의 세계관으로 충분히 마무리 지을 수 있는데도 멈칫한 것으로 보이니, 자신과 이야기의 힘을 온전히 믿지 못한, 용기 부족으로 느껴지게 됨. 과학도였던 것도 아니고 SF 전문 작가도 아니니 이해는 가지만, 이왕 잡은 무기인 만큼 더 확실하고 단호하게 휘둘렀으면 좋았을 텐데, 싶은 부분이 그 외에도 종종 있음. 그러니 전체적으로 하드와 소프트의 중간에, SF와 판타지의 중간에 어정쩡히 머물게 됨. 소설의 마무리를 해답이 아닌 ‘해답이라 할 만한 것’이라고 굳이 표현한 이유가 그래서임. 사심 살짝 담자면, 뭐가 됐든 당신 글 잘 쓰니 조금만 더 자신을 믿으면 좋겠다는 말을 제일 먼저 하고 싶음.
그러나 경계를 허무는 가장 큰 이유, 갈등을 해결하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한 아이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인 것은 정말이지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함. 여기서 한 아이는 비단 단 한 명의 아이뿐 아니라 여러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나는 폭넓게 ‘미래 세대’라고 보려 함. 나보다 어린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망가뜨릴 수 없다는 마음이 종국에 모두를 향한 궁극의 이타심으로 발현되는 것이라 믿고 싶음. 여기서 조금 더 과감한 해석을 덧붙이자면, 작가는 이제 더 이상 단순 번식은 번영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짚으려 한 것이 아닐까 싶음. 인류의 미래는 인구수나 인류만의 주관적인 기술 발전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원한과 애정을 동시에 품고 모두가 모두의 타자이며 하나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외치는 것 같음. 종말의 징조를 감지한 존재가 다차원에서 포착한 의미를 전해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들 정도임.
정리하자면 우다영은 책을 거듭할수록 자신만의 세계를 넓혀가는 것은 물론 필력 자체도 발전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음. 솔직히 이 책은 평을 못 쓰고 있어서 아예 안 쓸 생각이었는데, 내가 잘 이해한 건가, 하는 생각이 커서 괜히 건드렸다가 관념적인 수사 덩어리로 적당히 뭉뚱그리는 글을 쓸까 봐(이미 그렇게 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곱씹을수록 이야기가 주는 힘을 거부할 수 없어서 어떻게든 붙들어 매고 끄적거렸음을 밝힘. 그러니 이 글은 책 후기보다 우리 젊은 국문학에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있다는 걸 홍보하려는 목적이 더 큼. 오랜만에 재밌게 잘 읽었음.
추가로 어려운 만큼 해설이 없는 건 아쉽지만, 덮고 나니 이 책은 괜한 해설보다 이렇게 오롯한 작가의 말로 마무리되는 게 훨씬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음. 만약 읽는다면 꼭 후기까지 읽어 볼 것을 추천함.
끝으로, 작가의 출간된 책을 모두 읽어 본 독자로서, 나 역시 시공간 축을 묶어 하나가 된 시선 속에서 느껴지는 감상으로 평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당신의 글을 좋아하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추천작: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4.0 / 5.0
종말의 징조를 감지한 작가가 다차원 속에서 포착한 해법의 의미를 전해주기 위해 쓴 책인 것만 같다
24. 06. 17. 읽음
박참새
정신머리 / (2023)
‘깡패가 되려고 시를 쓴다’라는 수상 소감으로 화제였던 박참새 시인의 시집. 개인적으로 나는 ‘깡’ 있는 사람, 반항적인 면모가 있는 사람을 좋아함. 거기에 자존감도 높고 자신감도 넘치면 더욱 좋고. 나는 그러지 않기에. 일종의 대리 만족이지. 실제로도 그런지 글에서만 그런지는... 차치하고.
이왕 시작을 이렇게 한 거 조금만 더 하면, 이 소감문은 발표 직후 조금 논란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그 ‘논란’에 도무지 공감이 안 감. 시에 대해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물론 나도 시에 대한 나만의 지론을 명확히 세우지 않았지만, 서정적인 분위기만을 챙기거나 강렬한 메시지만을 담는 건 이젠 사실 살짝 구시대적인 감성이라고 생각함.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들의 성향이 바뀐 것 같다는 얘기. 당장에 이 책이 수상한 상의 주인인 김수영마저 자기 고백적 고뇌를 노래하기도 했으니까. 너무 딴 얘기로 빠지는데 아무튼, 이제 시는 소설과는 또 다른 기법으로, 파격과 도전으로 날것 같은 속마음을 표출하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암튼 그럼.
그렇기에 젊은 작가가 하고픈 말을 다 토해낸 시집으로 상을 탔고, 나는 ‘어른’들이 잡아 놓은, 젠체하는 규칙과 규율이 싫다, 매일 새로이 정의되는 윤리는 더욱 싫다, 그러니 나 건달이 되리라, 내 글 속에서만큼은 나 깡패로 살겠습니다, 는 소감은 적당히 공격적이고 적당히 대담한 정도라고 할 수 있잖아? 차라리 삐딱선 타고 싶은 건방진 젊은이의 전형적인 반항 멘트라고 하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암만 봐도 그냥 젊은이의 배짱이나 패기 정도로 보이지 않나? 저게 대체 어떤 의미로서 논란이 될 만한 건지 모르겠음. 와, 헉, 어떡하지. 넵넵. 감사함다. 앞으로 더 열심히 쓰겠슴닷ㅠㅠ 를 바란 건가?
자, 딴소리가 길죠? 그렇습니다... 저, 이 책 잘 이해 못 했습니다. ‘잘’도 잘 쳐준 거예요, 하나도 이해 못했습니다... 홍인혜의 ‘우리의 노래는 이미’에서 운과 열의 맛을 느낄 수 없다, 단편 소설의 설정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고 했는데(2화 참조)... 여기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음. 아니, 더 심함. 아니, 사실... 모르겠다는 인상만 강함.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우리노래’가 상대적으로 비장한 면이 더 강하다면 ‘정신머리’는 그보다 공격적인 면이 더 심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복잡하고 어지러움. 소설로 치자면 양선형의 ‘클로이의 무지개’를 읽었을 때 같음(11화 참조). 그래도 그나마 그건 소설이었지 이건... 아닌가, 소설이 읽기에 더 힘들었던 것 같기도...
진정하고 ‘클로이’에서의 감상을 발판 삼자면, 모르겠다는 건 아무래도 내가 작품들을 ‘이해’라는 측면 하나로 접근했기 때문일 것 같음. 일련의 경험으로 시라는 건 내가 작품에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보다는 시와 나를 동일 선상에 두고 차분히 나아가며 그저 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런 쪽으로 생각하려 함.
그렇게 머리를 살짝 비우고 글자대로 읽어 가니... 명확한 이야기나 강렬한 이미지보다는 서로 상충하는 키워드 몇 가지를 뽑아낼 수 있었음. 어느 한 작품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책 통틀어서. 그것들은 아래와 같다.
생과 사
낡음과 늙음
진짜와 가짜
일침과 비꼼
열등과 패배
사랑과 승리
도발과 발칙
구림과 빡침
애어른과 애어른
자연사와 조력사와 돌연사
정도...? 저 키워드들이 단일한 단어 그 자체로 쓰이기도 하고 중의적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저렇게 맞붙는 형식으로 대칭을 이루기도 함. 의외로 구조적인 형식이 많음.
게다가 문장 부호를 생략하는 건 예사고 비속어, 인용, 각주, 사진, 그림, 영어도 튀어나오는 데다 신문 기사나 희곡처럼 쓰기도 하고 자필 원고의 이미지 파일, 색다른 폰트 등을 활용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챗지피티에 물어보고 받은 대답을 싣기도 함(물론 그마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즉, 전반적으로 단순히 지면에 실려 있는 활자인 걸 넘어 하나의 시각화된 예술로 보이게끔 부단히 노력함. 이게 ‘시’라는 글로서 칭찬인가 싶긴 한데, 왠지 그마저도 시라고 하면 납득이 가고... 아무튼,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연출이 갖가지로 모여 있음. 여러모로 실험적임. 반대로 그렇기에 더욱 어지럽고 그렇기에 더욱 뭔 소린지 모르겠음.
내용을 보면... 일단 이 작가, 짜증이 많음. 세상 혹은 삶이라는 것 자체에 불만이 많은 것 같음. 탄생을 향한 한탄보다는, 말 그대로 발붙이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임. 근데 그렇다고 저러한 키워드, 느낌, 상징 들이 ‘활화산’처럼 튀어 오르진 않음. 의외로 잔잔하게 다가옴. 심상이 공격적이라고 한 것과는 어폐가 있을 수 있으나... 그러니까... 화가 나 있는 것도 맞고 온갖 기분 나쁜 티 팍팍 내는 것도 맞음. 실체 없는 허상을 향해 섀도복싱 오지게 날리는 것처럼도 보이고... 그런데 그 모든 울분이 ‘살고 싶지 않아!’ 하는 강렬한 절규보다 ‘나 어떡하지...’ 하는 자탄으로 보여서 그런 것 같음. 토해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우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자신의 감정을 개운하게 배설하는 게 아니라 눈물과 함께 게워 내는 것 같음. 목에 무언가 걸려 컥컥대는 느낌이 강함.
그리고 그 한탄이... 솔직히 아주 못 알아듣겠는 건 아님. 근데 무언가 알겠다고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움. 전체적으로 이 모든 기분에 대한 ‘알 것 같음’의 뉘앙스만 강하게 휘몰아쳐서 읽는 내내 너무 어지럽고 불편했음.
작가에 대해 좀 더 알면 이해가 될까 싶어서 찾아보다 알라딘 투비컨티뉴드에서 연재한 ‘나는 싫어요’라는 산문까지 어쩌다 읽게 됐는데... 생각보다 너무 솔직해서... 다른 의미로 시집 감상에 많은 도움이 됨... 물론 시라고 해도 엄연히 화자가 따로 있긴 하지만, 본인의 내밀함을 노래한다는 측면에서 시의 화자와 작가는 어느 정도 동일시될 수밖에 없기에, 왜 그렇게 화와 짜증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책과 한탄을 일삼는지 대충은, 조금은 ‘알 것 같음’.
뭘 그리 알 것 같은지 말하는 것보단 조금 다른 얘기가 어울릴 듯한데, 시집과 산문을 읽었을 때 이 작가, 굉장히, 본인이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자신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단, 때로는 싫고 때로는 싫은 걸 넘어 혐오스럽기도 하나 그럼에도 ‘나’라는 존재가, 내가 싫은 만큼 혐오스러운 이 세상에서 이대로 사라지는 건 아까워서 삶을 붙들어 매고 있다는 느낌이 컸음. 유형과 무형의 억울함이 짜증의 근간임.
그렇다면 또 ‘자기애’라는 키워드가 도출 안 될 수가 없는데(상충하는 키워드는 당연히 ‘자기혐오’), 재밌게도... 작가가 자신을 그렇게 좋아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음. 불만의 대상에 세상과 더불어 자신도 포함된 것으로 보이니까. 그러나 역으로 이렇게 내면의 이야기를 시로 푼다는 것, 그리고 그걸 묶어 투고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극렬한 자기애의 한 모습이 아닐까 싶음. 즉 ‘내가 나의 아군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자기애를 ‘창작’으로 표출했다고 할 수 있는데, 작가는 이렇게 창작이라는 극한의 나 ‘덕질’을 통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 괜찮을 이유를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음. 그렇기에 이 책은 시집의 탈을 쓴 통렬한 ‘고백서’로 보이고 그렇기에 이 책의 주된 감성은 배설이 아니라 고해로 보임.
그러나 시를 통해, 이 책 출간을 통해 작가 목구멍에 박혀있는 가시가 잘 뽑혔는지는 모르겠음. 만약 안 뽑혔으면 다음 책은 ‘정신머리 2’가 될 거고, 뽑혔으면 전혀 다른 느낌의 내용이 나오겠지. 천천히 이루어질 수도 있을 거고, 영원히 안 바뀔 수도 있을 거고. (누가 봐도 안 뽑힌 걸로 뵈긴 하지만) 그건 차차 지켜볼 일.
여기까지 읽었을 때, 혹시 이 글이 작가(혹은 이 책)를 두둔하는 것처럼 보이시나요?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깡 있는, 반항적인, 자존감 높은, 자신감 넘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근데 여기서 이 작가(책)는... 예상과 달리 해당되는 게 많지 않아요. 그러니 좋게 해석하려는 찬양이 아닌, 시를 행과 연 하나하나 분석하던 국어 교육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한 독자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봐줬으면 좋겠음. 이해한 시가 하나도 없으니 후기를 쓰는 게 맞나 싶긴 한데, 이렇게라도 주절거리지 않으면...! 내가 이걸 읽었다는 증거가 하나도 남지 않으니 머리 쥐어짜면서 한 방울 한 방울 써 내려갔음을 밝힘.
정리하자면, 여러 실험적인 구조를 통해 읽는 맛을 넘어 보는 맛은 뛰어나지만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고 아 읽다 보니 결국엔 시인 자신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구나 싶으면서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며 잘 모르겠고 그래서 결국 한다는 말이 ‘알 것 같다’, ‘그렇게 느껴진다’ 정도이니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내가 지금 뭐라 얼버무리는지도 잘 모르겠으나... 사실,
시라는 거,
“다 그런 거 아닌가?”
ㅋㅋ 웃겨 정말.
추천작: 사랑의 신 - 등장인물에게
3.5 / 5.0
단일과 중의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조력으로 돌연한 죽음을 꿈꾸는
(그러나 마음먹을 때까지는 돌연함이 날 기다려 줘야 함)
우리네 젊음의 정신머리
잠깐 젊다는 건 누가 정한 건데 나는 거부할 테다
윤리적 젊음 따위
갈팡질팡하면 좀 어때 너네도 다 그랬으면서 나이 먹은 게 뭐 대수랍시고 진중한 척 뭐 좀 아는 척 내려다보는 거 웃겨 진짜
└ 와 진짜 공감
그러니 그냥...
나, 안아...
아니 누가 안으래 오지 마 다 꺼져
왜
뭐
뭐, 씨발...! 불만 있어(요)?
24. 11. 23. 읽음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 (2014)
스포주의
어린 시절 양옆이 완벽히 가로막히지 않은 벽을 가운데에 둔, 두 집이자 한 공간에서 같이 살았던 ‘소라’, ‘나나’ 자매와 ‘나기’가 이제는 어른이 되었어도 각자의 삶을 여전히 서로에게 엉겨가며 살아가는 이야기.
문체 얘기부터 하면, ‘백의 그림자’(4화 참조) 후기에서 ‘엷은 김애란, 비문 없는 박솔뫼’ 같다고 했는데,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나 타 작가들과의 비교는 그만해야 할 듯함. 그래도 말 나온 김에 조금만 하면, 김애란보다는 끈적함이 덜해 감정이 무겁게 잡히지 않아 담백함이 느껴지고, 박솔뫼보다는 예민함에 날이 서 있다는 느낌이 덜해 뭉툭함으로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 강함.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하나 독자적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되는, 어스름한 분위기만큼은 어떤 작가의 문체와도 다름.
특히나 이 책에서는 ‘백그’ 때보다 독백 속 대사의 중얼거림이 더 심해져 ‘빙글빙글’ 도는 듯한 감성이 더 짙어졌는데, 쉽게 말하면 의식의 흐름적인 면이 더욱 강해졌다고 할 수 있음. 그러나 한도 끝도 없이 퍼져가는 공상의 세계는 아니고, 이건 이렇지, 이러면 저렇지, 저러면 그렇지, 하며 뻗어가는, 자기 전에 누워서 빠지는 잡념의 세계 같은 면이 큼. 여러모로 나긋하고 나른함.
인물로는 앞서 말한 세 인물과, 자매의 어머니인 ‘애자’, 나기의 어머니인 ‘순자’까지 다섯 명이 등장함. 굳이 어머니들을 포함한 이유는, 이들의 말과 행동이 자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임. 어이없고도 안타까운 사고로 상부한 애자는 그날 이후로 껍질만 남은 듯한 텅 빈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그 모습을 통해 소라와 나나는 ‘전심전력’의 사랑에 회의를 품게 됨. 어느 한 존재를 향한 강력한 사랑이 뜻하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함께 붕괴된 존재는 남아 있는 존재들에게 쓸 사랑을 남기지 않은 채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함께 사라져 버린 것으로 보이기 때문임. 그렇기에 소라와 나나는 애자를 ‘엄마’보다 ‘애자’ 그 자체로만 여김.
이에 반해 순자는 엄마의 손에서 버려진 것과 같은 자매에게 도시락을 챙겨주는 등 아들 나기를 키우는 동시에 남과 다를 게 없는 아이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풂. 그리고 그 안에서 소라와 나나와 나기는 남매처럼 자라게 됨.
재밌는 건 이렇게 자란 세 사람이 사랑에 대해 각각 다른 성향을 갖게 되었다는 거임. 소라는 다른 누구도 아닌 소라 그 자체로서 일생을 끝내고 싶어 하고, 혼전임신을 한 나나는 무섭지만 모르기에 무서운 것으로 생각하여 무섭더라도 출산을 감당하려 하지만 언제든 괜찮아질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을 추구하기에 일말의 사건을 계기로 결혼은 거부하고, 나기는 부고와 생존을 동시에 기다릴 정도로 누군가를 향한 깊은 마음을 홀로 품고 살아가고 있음.
더 재밌는 건 이렇게 다른 세 사람이 어째선지 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것. 기본적인 말투와 더불어 말과 행동이, 한 사람을 삼등분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다르지만 완벽히 다르지 않은, 비슷하나 완벽히 비슷하지 않은 모든 묘사가 세 사람을 함께 자랐다는 것 이상으로 한 테두리 안에 가둠. 더 나아가서는 전작 백그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데, 소라, 나나, 나기와 더불어 ‘은교’와 ‘무재’까지 더했을 때 다섯 명의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은 걸 생각하면, (이 두 책에서) 모든 인물은 사실 작가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음. 자신의 부분 부분을 쪼갰기에 달라 보일 순 있으나 본질은 비슷하게 보이는 거임. 초반에 세 사람이 엉겨가며 살아간다고 표현한 이유도 그들이 완전히 분절된 존재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책(혹은 백그까지 두 책)의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은 것도 설명이 됨. 작가의 생각 나열이 곧 줄거리이기에 마땅한 사건보다는 인물의 독백으로 심상이 짧게 전개될 수밖에 없고 그 끝은 사건이나 상황의 종결이 아닌,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 – 백그)이나 계속해보겠다는 다짐(삶, 사랑 혹은 글쓰기 그 자체 - ‘계속해보겠습니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임.
작품 내적으로 돌아와서, 그래도 이번엔 백그와 달리 인물들의 ‘변화’가 주요한 키워드로 보이는데, 사랑 따위 관심 없어 보이던 소라는 종장에서 누군가가 신경 쓰인다고 하고, 나나는 인간은 덧없고 하찮기에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넘어 그 사랑이 늘어난 탓에 자신이 조금은 나약해졌다고 생각하고, 나기는 한 대상만을 향한 열렬한 마음의 끝에서 타인이 아닌 자신의 존재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에 닿게 됨. 이렇듯 얼핏 보면 나나의 임신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만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껍데기 속에서 인물 소개에 그치는 텅 빈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일정 순간에 삶이 멈춰버린 부모를 넘어 계속해서 살아가며 계속해서 조금씩 변해가는 자식들의 이야기라고 확대 해석하여 볼 수 있을 것 같음.
자, 애자는 이런 식의 언급으로 넘어가고, 순자는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그건 ‘정상’ 가족 형태의 타파라고 생각함. 순자는 나기가 결혼해 가정을 꾸릴 것을 바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순자 본인은 자신과 아들과 남모를 여인과 그의 아이 둘까지 포함한, ‘비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었음.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단순히 결혼이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셋 모두에게 절대적인 부모라 할 수 있는) 순자가 행한 사랑의 형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용했을 뿐임. 그렇다면 이는 가족 구성원에 따른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사랑과 관심이라는 매개체로 허물려고 했다고도 할 수 있음.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것이 다름 아닌 가족일 테니까.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앞서 말했듯 이 책의 분량은 굉장히 짧습니다... 함축적이고 상징적이라는 뜻은 거꾸로 말하면 묘사와 서술이 부족하다는 거고, 극적인 면이 없다 보니 심심함을 가장한 불친절한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임. 실제로 인물들의 변화라고 해봤자 몇 줄 안 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그저 인물 셋이 번갈아 가면서 중얼거리다가 끝날 뿐이거든.
하지만 잘 우린 차를 한 잔 마시듯, 심심한 맛 뒤로 어떤 짙은 향이 올라옴. 차를 마시는 그 행위 자체가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인 것처럼 조용히 주절거리는 그 읊조림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또 그렇게 살아가기에 조금씩 변해갈 터, 미적미적하게 나아갈지라도 그러한 삶 자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고백이 허구적 소설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맞물려 다음 작품을 궁금하게 만듦. 저 이런 글 씁니다, 가 아니라 저 이것으로 끝내지 않을 거예요, 하는 느낌이 강함.
그러니 여기서 잠시 멈출까 했지만 황정은... 음...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3.5 / 5.0
계속 살아가보겠습니다, 계속 사랑해보겠습니다
24. 12. 05. 읽음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 (2021)
스포주의
‘K’시에서 일어났던 국가 폭력 학살에 대한 책을 쓴 후 약 사 년여의 시간 동안 몇 개의 사적인 작별을 한 소설가 ‘경하’는 유서를 완성하는 일에 집착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인선’으로부터 신분증을 들고 병원에 와줄 수 있겠냐는 연락을 받는다. 제주도에서 지내는 인선은 목공 작업 중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해 서울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은 상태. 이윽고 인선은 경하에게 지금 당장 제주도 집에 가 홀로 남은 새 한 마리에게 물을 주고 자신이 퇴원할 때까지 돌봐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오늘 밤 새가 죽을 거라면서....
한강 소설은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희랍어 시간’ 정도는 읽은 터라 어떤 스타일인지 대략 알고 있긴 했음(틈새 자랑). 가장 큰 특징을 먼저 꼽으라면 아무래도 차분하면서도 선연한 문체. 감각, 오감을 활용해 순식간에 어느 한 점으로 수렴하는 듯한 나약하면서도 강렬한 읊조림의 향연이, 이 지점이 이 책에서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 곱씹기 위해 눈을 머물게 함과 동시에 다음 문장을 만나고 싶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듦. 소위 ‘가볍다’는 문체의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음. 서사의 진행과 별개로 독자를 순식간에 훅 끌어당기는 힘이 있음.
하지만 좋게 말해서 미문이지, 나쁘게 말하면 비유와 상징을 범벅 해서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는 문장투성이임. 서사와 별개로 흡인력은 좋지만 이 문장이, 이 단락이 이 책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쉽게 해결되지 않아서 눈은 다음 문장을 읽고 있는데 머리는 아직 이전 문장들에 고정되어 있게 만듦. 특히나 누가 봐도 중요해 보이는 특유의 이탤릭체는 독서를 한층 더 느리게 만드는 일등 공신. 아니 그럼 천천히 읽으면 될 것이지. 그게 단점임? 무조건적인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한 부분에 지나치게 신경 쓰게 해서 전체보다 부분에 매몰되게 하는 건 짚고 갈 부분이라 생각함. 곱씹어도 감이 안 오니 일단 넘어가자,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듦. 나는 이렇게 다 담아놨는데(숨겨놨는데) 알아채지 못한 건 독자 너의 잘못이라고 하는 듯한 방식을 썩 좋아하지 않기에...
게다가 앞서 말한 세 권을 읽으며 내가 이 작가에게서 가장 강하게 느낀 감상은 바로 ‘맥아리가 없다’는 것이었음. ‘나약하고도 강렬함’이라고 한 만큼 불꽃같은 표현이 훅 일어날 때도 있으나, 스산하고도 처연한 기류만이 작품들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서 문어체적 작위성이 강하게 다가와 그 중심은 너무 공허하게만 느껴졌음.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기에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음. 문장마다 점철된 많은 비유가 실은 어째선지 과하지 않고 그 문장과 꼭 맞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 문장 한 문장 조심히 쌓아 올려 단락을 만들어가는 느낌이 커서, 어려울지언정 지저분하지 않고 단정하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으나 간결함이 느껴짐. 이러한 점이 맞물려 서사나 구성력이 약할지라도 완성도와 더불어 책장을 덮은 후 은은하게 다가오는 먹먹함만은 다른 어떤 작가와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함.
자, 한강이라는 작가에 대한 나의 개략적인 인상은 이렇고... ‘작별하지 않는다’로 넘어가 볼까요. 이 작품도 지금까지 말한 저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나 조금의 변주, 고유한 특성이 몇 가지 보이기에 글이 길어질 것 같네요.
우선 감각, 그중에서도 촉각과 통증을 활용한 예민한 문장들이 그 모든 고통을 독자에게 전해주기 위해 쓴 것만 같아 압도적인 흡인력과 기묘한 생생함이 공존하고, 그 속에서 불꽃 같기도 하고 눈꽃 같기도 한 뜨거운 연약함이 마땅한 설득이 없음에도 인물에 마음을 쏟게 함. 무엇보다 (‘소온’ 때와 마찬가지로) 맥아리 없는 문체와 가슴 아픈 역사가 맞물려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의 농도가 부족함 없이 잘 나타나 있음.
또한 장면 전환이 굉장히 빠름. 독백과 회상과 대화가 전조 없이 휙휙 바뀌는 데다 이때, 그때라는 표현을 쓰면서 (언제 말했는지 모를) 앞서 말했던 시점을 갑자기 끌고 오는 경우가 많아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지, 언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건지 시간 선이 헷갈릴 수 있음. 여러모로 집중할 수밖에 없게 만듦.
이를 활용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을 짚자면, 일단 불친절함. 물론 그동안의 소설들도 썩 독자 친화적이지는 않았지만... 유독 여기서는 읽는 동시에 의문이 피어오르고 그 의문이 쉽게 해소되지 않음. 경하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것인가, 계속하고 싶은 것인가. 경하에게 유서는 어떤 의미인가. 유서는 삶을 끝내기 위한 수단인가, 연장하기 위한 핑계인가. 경하가 겪은 사적인 작별이란 무엇인가. 경하도 누군가를 영영 잃은 경험이 있나. 인선은 경하를 왜 그렇게나 ‘하도’ 생각했는가. 경하가 말한 ‘프로젝트’가 제주에서의 참극과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학살에 대한 책을 써 본 작가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저 인간적인 매력 때문인가. 새는 어떤 의미인가. 말할 줄 아는 새가 먼저 죽고 말할 줄 모르는 새가 남아있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인선에게 새는 어떤 존재인가. 경하는 왜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새를 위해 노력하고 슬퍼했는가. 경하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인선은 죽었는가, 살았는가. 새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결국 이 불친절함은 책의 주요 내용인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까지 예열이 너무 길어서 생기는 것 같음. 경하는 우여곡절 끝에 인선의 집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기이함 속에서 인선의 가족 이야기를 듣게 됨. 촛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째선지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자신의 부모님은 그 참극의 피해자였고 늘 작고 약하다고만 생각해 온 어머니가 실은 국가 폭력 속에서 사라진 오빠의 시신을 찾기 위해 수십 년을 고군분투했던 거대한 사람이었음을 담담하게 밝힘. 그리고 이 내용이 약 300쪽 분량 중에서 200쪽 정도에 달해야 시작함. 그전까지는 경하가 겪어 온 고통의 나날이나 인선과의 일화, 난데없는 부탁을 받고 폭설을 뚫으며 제주 중산간 마을로 향하는 경하의 섭험으로 이루어져 있음.
주목할 점은 아무리 인선이 얘기하고 중심인물이 ‘정심’(인선의 어머니)이 된다 한들 그럼에도 절대적인 화자는 경하라는 점인데, 경하의 상태나 경험에 대해 두루뭉술하지만 확실하게 책 일부를 할애했다는 것, 발화자로서 인선을 국가적 폭력의 희생자나 생존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오던 인물로 설정한 것, 정심의 이야기와 더불어 제주에서의 사건을 여러 기록을 통해 피해자의 측면에서 길고 길게 설명한다는 면에서, 사실 이 책 자체가 경하와 인선이 만들고자 했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음과 동시에 한강(서울 경, 물 하) 자신이 제주 4.3 사건에 대해 알아간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음. 혹은 전혀 관심이 없고 관련도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 온 한 개인에게 이 나라에 발붙이고 있는 한 이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 역사 속에서 살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고요히 꼬집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기에 역으로 줄곧 느껴온 ‘맥아리 없음’이 잘 느껴지지 않았음. 도리어 그 안에 단단하고 곧은 심지가 하나 생긴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슬프고 괴롭더라도 이 역사를 알아가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강렬함과는 또 다른 단호함이 곳곳에서 보임.
또한 (같은 역사 소설) 소온과 대비해서 슬프다는 감정 역시 덜함. 이는 구성과 연출의 차이 때문일 것 같은데, 화자의 존재 시기, 당사자성, 화법 등이 다를뿐더러 관찰자로서 간접 경험을 통해 독자에게 건네주듯 전해주다 보니 직접적으로 내리꽂던 소온과 달리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시차가 생겼기 때문인 것 같음. 이는 표현 방식의 변화를 언급할 뿐이지 슬프지 않아 별로라는 게 아님을 밝힘. 처음에는 이러한 엄마 – 딸 – 주인공 – 독자로 전해지는 간접의 간접 화법 전송이 ‘5월 광주’에 비해 ‘4월 제주’의 자료가 부족하거나 단언할 수 없는 자료가 많아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무례한 생각을 했는데, 그보다는 작가로서 욕심이나 도전이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 봄. 아무래도 직접적인 화법은 이미 한번 했으니까 그와는 다른 방식을 채택한 게 아닐까. 게다가 소온의 감상평에서 슬프다는 말이 대부분이었으니 이번에는 단순히 슬프다는 감정 하나에 독자가 매몰되지 않도록, 이 사건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사건의 참혹함에 독자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흐름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싶음. 그렇게 본다면 초반부에 쌓아 올리는 듯한 서술과 중후반부에 쏟아내는 듯한 서술이 이해가 감.
하지만 어째선지 조금 초조함이 보이기도 함. 내가 알아본 건 어떻게든 전부 다 전해줘야 한다는 강박과 이 글로 정녕 나에게 차올랐던 감정이 독자에게도 가닿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음. 정말 갈수록 소설이 아닌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는데, 정말로 작가가 자신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이 책은 완성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쓴 건 아닐까 싶은, 어떤 알 수 없는 무거움까지도 보임. 이 작품을 ‘필생의 역작’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늦기 전에 완성해야만 하는 작품’이라고는 생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음. 그러니 단단하되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작은 불안함이 느껴질 수밖에.
다른 특징으로는 갑작스러운 환상성. 아마 이 책에서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아닐까 싶음. 마음 아픈 것과 별개로 갈수록 서술이 너무나 모호하고 알쏭달쏭함. 죽어서 묻었던 새가 어떻게 다시 나타난 것이며, 병원에 있던 인선이 어떻게 제주 집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선 그냥 단순하게 매듭짓고 싶음. 둘 중 누군가가 죽었다거나 둘 다 죽었다거나 누군가의 꿈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저 혼곤 속에서 경하가 인선에 대해 알아간 과정을 후에 재구성해서 글로 쓴 것이라고 믿으려 함. 즉, 이 책은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현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진정된 후 경하와 인선이 함께 써 내려간 책이라고 믿고 싶음. 왜냐하면 나는 인물이 죽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임. 그러니 모호하다면 무조건 살아있다고 생각함. 그저 그뿐임. 이 얘기 끝!
그럼 새는? 새도 안 죽었다고 생각함? 애석하게도... ‘아마’는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날 안에 물을 안 주면 죽는다는데 한참 늦게 도착했잖아... 물론 경하가 산길에서 겪은 사고의 시간 흐름마저도 불명확해서 무엇이 진실인지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지만, ‘새’의 육체는 소멸해야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함.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촛불과 엮어 말하자면, 뼈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설명을 굳이 넣은 걸 보면 새는 제주도(현무암) 혹은 총알에 뼈가 뚫린 희생자라고 할 수 있고, 한 곳에 있을 수 없는 두 사람이 한 곳에 있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촛불은 희망 혹은 의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희망을 통해 이미 죽고 없어진 육체가 그림자로서 환생해 어른거린다는 점에서 새는 단순히 학살의 장소나 과거 희생자가 아니라 잊혔으나 잊히지 않은 과거 자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역사의 이면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인선이 새를 기른 것도, 아낀 것도, 경하가 터무니없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새의 죽음에 슬퍼한 것도 납득이 됨. 역사란 누구도 관심 두지 않으면 금세 사라져 버릴 정도로 가볍다는 것을, 그러나 잊지 않으려는 노력, 작별하지 않겠다는 결심하에서는 영생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게 아닐까.
한편으로 경하가 왜 그리 죽음과 유서에 집착했는지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데, 밝히지 않은 ‘사적인 작별’(이혼 혹은 참척)로 정말 죽음을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K시에 관한 책을 쓴 후 경하는,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으나 학살에 대한 간접적 트라우마로 참혹한 역사를 이제 그만 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음. 그렇다면 여기서 죽음은 생명이 종료되는 상태가 아니라 ‘역사를 잊은 상태’라 할 수 있고 유서는 ‘역사에 대해 그만 알아가겠다는 결심’이라고 할 수 있음.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하에게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대상은 자식일 수도 있고, 끔찍한 역사를 꿋꿋하게 마주했던 자신일 수도 있을 거임. 그러니 고민한 것일 테지. 유서를 완성하고 죽을지 말지.
그밖에 눈이나 나무(우듬지) 역시 중요한 키워드인데 그 모든 요소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며 해석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음. 흰 눈은 빨간 피와 대비되어 비극을 강조하고 검은 나무는 흰 눈과 대비되어 위령을 강조하니, 그냥 넓게 봐서 소멸과 생존의 주체로서 인간이 겪는 시련과 치유의 굴레라고 하면 될 듯함.
정리하자면 그동안 작가가 추구해 온 작풍의 장단점이 극대화되어 나타나 있다고 봄. 전작을 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작가 스타일에 있어 어느 한 정점이나 분수령에 도달했다고 느껴짐. 특히나 역사 소설을 이제 자신의 한 정체성으로 굳혔다고 할 수 있는데, 소온에서의 감성적 완결성과 더불어 이번에는 환상성까지 과감히 결합했으니, 가히 작가만의 ‘영혼적 리얼리즘’의 정수라는 생각이 듦. 맥아리가 없는 건 작가가 아니라 읽고 힘이 빠진 나였음을...
즉, 시대의 처절함과 함께 작가의 처절함이 같이 보인 소설이자, 작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음. ‘사력을 다했다’는 추천사가 그야말로 딱 어울림.
여담으로 하나 아쉬운 건 끝내 해소되지 않는 모호함. 그러니 재밌게 읽었지만 이것이 작가의 최고점이 아닐 것이라 믿음. 읽으면서 다음 문장이 궁금했던 것처럼, 이후에 나올 다음 책을 기대함.
4.0 / 5.0
나는 작가에게 이 책을 쓰라고 한 적이 없고 작가도 나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작가는 썼고 나는 읽었다, 그래야만 했다
25. 01. 11. 읽음
조승리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 (2024)
열다섯 살 때부터 눈이 안 좋아지기 시작해 이제는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작가의 에세이. 시각장애를 인지한 순간부터 시작하여 딸로서, 학생으로서, 안마사로서,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살아온 작가만의 ‘지랄 같은’ 일상들이 팝콘처럼 튀어 오름.
먼저 무엇보다 강하게 든 생각은, 이 작가, 참으로 강인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음. 하루가 다르게 흐려지는 시야가 아까워 하루 종일 책을 읽기도 하고(학교 땡땡이는 일상이고), 가족 앞에서는 애써 괜찮은 척을 하고(하지만 수틀리면 가출도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지랄’로 슬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지랄을 뒤로하고 일상을 더 진하게, 후회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수긍과 낙천을 아득히 뛰어넘는, 그야말로 어떤 경지의 ‘이지제지(지랄은 지랄로 맞선다)’가 느껴짐.
하지만 구성만 보자면 시점이 불분명하게 왔다 갔다 해서 일정한 흐름 속에서 편안히 읽기엔 어렵고 그 어지럽고 산발적인 에피소드에서 등장인물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아 파편적인 특성이 강함. 즉 단순히 작가의 성격 말고 이 글을 쓴 사람 자체에 대해 차근히 알아가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림.
그리고 가끔 묘하게... 이 표현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데, 묘하게 올드한 면이 있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구수하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고 작가 나이가 어떻게 되더라? 하는 면에서는 (아주 살짝) 부정적임. 아마 이건 나이보다는 살아온 환경 때문일 텐데, 일찍이 철이 들 수밖에 없었을 유년 시절과 체념과 요해 사이에서 지랄을 ‘승리’로 승화해야 했을 청년 시절의 부조화가 이러한 기묘한 올드함을 만들어 낸 게 아닐까 싶음.
그렇지만 가볍고 화끈한 필력은 신명 나고 사투리를 통한 대사도 참으로 맛깔스럽기에 그지없음. 시원시원하다기보다는 정말 화끈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림. 솔직히 이렇게 ‘한 성질’하는 사람의 에세이는 처음 읽어 봄. 앞이 보이지 않기에 감정 발현이 더 격해진 걸까 혹은 일부러 더 강하게 보이려 하는 걸까, 는 너무 실례인 말이고 애초에 그렇게 보이지도 않음. 음, 이것도 실례인 표현일 수 있으나... 그냥... ‘쾌녀’ 그 자체임.
즉, 작가에게 (이 책 안에서) 장애는 글을 쓰게 된 원동력 정도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정체성이 아니란 뜻임. 본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앞이 안 보이는 걸 언급할 뿐임. 보이면 보이는 대로 또 다른 화끈한 이야기들이 펼쳐졌을 것 같음. 장애인이 쓴 이야기에서 장애를 지우려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요소 하나만으로 판단하기엔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음. ‘본다’는 표현을 많이 쓴 것도 어쩌면 이렇게 보이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음.
물론 마냥 밝고 활기차지는 않음. 당장에 책 삼 분의 일이 장애인으로서 겪은 수모이기 때문임. 더욱이 ‘장애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잊고 산다, 체념할 뿐이다’는 문장에서는 작가가 그동안 겪은 모든 일이 함축되어 다가왔는데, 그 체념에 나의 지분은 없는지 반성하게 되었음. 장애인이 진정 힘든 이유는 그 장애라는 것 하나의 속성 때문임은 아닐 것이기에.
또 다른 삼 분의 일은 어머니와의 일화인데, 밝히지 않은 어떤 사정으로 아버지와는 불화한 듯함. 또한 언니나 남동생은 소개 수준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주된 가족은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음. 그리고 정말... 모녀가 쌍으로 쾌녀임(어머님은 왠지 이런 표현 좋아하셨을 것 같음)... 가히 말 그대로 ‘휴먼 다큐보다는 시트콤에 가까운’ 사람들... 진솔하고 유쾌해서 도리어 울컥하게 만드는 사람들...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끝내기엔 엄마와의 관계가, 가학적인 애증을 기반으로 한 관계가 너무나 깊음. 자식이 장애인이 되어 버린 엄마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자신을 창피하다고 여기는 엄마를 둔 자식의 심정은 또 어떨까. 서로를 지독히도 사랑하고 연민하고 증오하는 모녀를 보고 있자니 내 억장이 다 무너져 내릴 정도임. 위태롭게 유지되던 관계의 끝은 결국 한 쪽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마저. 그리고 남은 쪽은 사라진 쪽에 마지막까지 죄책감을 느낀다는 점마저.
마지막 삼 분의 일은 마사지 숍에서의 일화들임. 여기는 음... 뭐라고 해야 하지, ‘불편한 마사지 숍’... ‘어서 오세요, 마사지 숍입니다’... 같다고 해야 할까...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와 주인공에게 속마음을 터놓고 주인공은 그에 공감하기도 하고 일침을 놓기도 하며 해결 아닌 해결을 제시하는... 그런 감성이 컸음. 본인 성격을 본인이 너무나 잘 알기에 하나의 캐릭터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물론 ‘따뜻힐링’이라기보단 ‘매콤힐링’이긴 하지만... 오케이, 이건 여기까지.
그래도 체념이라는 단어가 끝나기 무섭게 온갖 수모에 지지 않고 다양한 도전을 행하는 모습에서는 마음 한편에서 얄팍한 연민으로 죄책감을 느낀 것까지도 새로운 죄책감으로 느낄 만큼 존경심이 솟아올랐고 끝끝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순간에는 지금 이 문장을 만나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감격스러웠음.
정리하자면, 팝콘이긴 하되 단순히 일반 맛은 아니라는 것. 온갖 맛이 섞여 있음. 달고 짜고 매콤함은 기본으로 곳곳에 부드럽고 고소한 맛도 있고 어느 한 쪽엔 무슨 알 수 없는 맛까지 있음. 가끔은 덜 익은 옥수수도 있어 무턱대고 씹었다가 이가 얼얼해지기도 하고 약간은 씁쓸하고 텁텁하기도 함.
그러나 분명한 건 색다르다는 것. ‘일반적인’ 과자와는 확연히 다른 맛이 있음.
여담으로 책 초반에 이 책이 점자 도서 혹은 전자책으로 만들어졌을 때를 위해 간략히 표지 그림을 설명한 글이 있는데 인상적이었음.
3.5 / 5.0
나에게 찾아온 지랄은 나만의 지랄로 응수하자, 그리고 항상 승리하자, 한 번뿐인 내 인생이 축제가 될 수 있도록
24. 11. 14. 읽음
정보라
아무튼, 데모 / (2024)
취미가 ‘데모’라고 할 만큼 데모 참여에 열성적인 작가의 에세이. 현장 구성보다는 (중년 여성이자 시간 강사, 작가로서) 현장 참여와 (10여 년 동안 참여해 온 데모들에 대한) 소개에 중점이 맞춰져 있음. 해방과 자유와 평등으로 이루어진 ‘유토피아’가 지금 당장 실현되지 않더라도 더 좋은 앞날을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이들을 위한 헌사이자 그 투쟁의 자리에 자신도 함께하겠다는 다짐이 굳게 담겨 있음. 더불어 흔히 말하는 ‘데모꾼’, ‘시위꾼’을 보며 쉽게 갖는 의문, 저들은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걸까 혹은 저들은 대체 왜 저렇게 본인과 상관도 없는 일에 열심일까, 에 대해, ‘인간을 인간으로서 보호하고 존중하기 위함’이라고 완강히 대답함. 그로 말미암아 근 10여 년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회 문제들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건 보너스.
그러나 더 넓은 평화를 추구한다는 전체적인 주제는 좋으나... 하나의 책이자 글로써는... 왜 이렇게 아쉬운 느낌이 제일 먼저 드는지 모르겠음. 우선 문장이 지나치게 간단함. ‘저주토끼’ 때도 좋게 말하면 깔끔하고 나쁘게 말하면 쉽다고 하긴 했는데(12화 참조), 얇고 가벼움을 장점으로 내세우는 ‘아무튼 시리즈’임을 감안해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간결해서 단순함을 넘어 딱딱함까지 느껴짐. 오죽하면 맨 처음 챕터인 ‘준비물’은 본문이 아니라 책 소개 문구인 줄 알았음.
게다가 그렇게 간결한 문장들에 비해 단락 내 흐름이나 메시지 완결성은 또 중구난방이라 하고 싶은 말이 잘 정돈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음. 작가가 이 책을 쓰면서 어떤 감정에 휩싸였을지는 예측이 되나(감격, 분노, 미안함, 고마움, 답답함, 안타까움, 벅차오름 등) 그것이 글을 통해 차분히 순차적으로 다가오지 않아 다급함만 느껴졌음. 정말 심하게 말하자면 마감에 쫓겨서 급하게 쓴 원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 에세이보다 메모 뭉치에 가깝다는 인상이 큼.
소개된 시위들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하니 내용을 짚는 것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고(일례로 요새 뜨거운 감자인 ‘차별금지법’에 대해 작가는 찬성 입장이지만 전과나 성적 지향까지 평등의 요소에 포함하려는 건 난 의문임. 막말로 살인자와 소아 성애자를 나랑 같은 선상에 두는 게 유쾌하진 않잖아. 극단적 예시만으로 차별의 요소 내에서도 차등을 두려는 거임? 범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거임? 정상적인 성적 지향이 정해져 있다는 거임? 타인과 타인이 평등해지는 데 조건이 있다고 보는 거임? 어, 그... 그렇지만 차별금지법 찬성과 ‘대한민국은 무책임한 남자가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하는 것과는 어폐가 있다고 생각을... 그럼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필요 없다는 거임? 아니, 그... 벌써 밑천 다 드러났죠? 그러니 더 건들지 않겠습니다), 더 좋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겠다는 단호한 각오가 주제라는 것만 가져가면 될 듯함.
자... 끝입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여기까지입니다. 글솜씨랄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아 굉장히 재미없지만 담고자 하는 단 하나의 주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만은 잘 와닿아서 뜻깊게 읽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좀 풀어보려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개인적인 넋두리이니 안 궁금하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별점은 3.0 줬고요, 한 줄 평은 ‘오늘보다 좋았던 어제를 넘어 어제보다 좋은 오늘을 꿈꾸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바라며’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외면하고 싶은 감정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불편함’이었음. 이 사람은 왜 그렇게나 시위 장소를 찾아다니고 흔히 말하는 ‘약자’와의 연대를 서슴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들은 사실 나를 겨냥한 것과 다름없다는 걸 인정하는 데까지 오래 걸렸음. 왜 나는 그렇게나 시위에 무관심하고 약자의 고통에 무관심한가. 그렇다면 그 불편함은 사실 ‘부러움’과 같은 감정이라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할 듯함. 나도 실은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임.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힘을 실어주고 싶다. 안일하고 안전하기만 한 내 일상이 오롯한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만큼, 나의 안전함을 다른 누군가에게 베풀고 싶다. 행동하지 않는 내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애써 젠체하며 죄책감을 불편함으로 돌린 거였음.
부끄럽지만 나도 작년 9월 서울 혜화역에서 열린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나 12월부터 진행 중인 탄핵 촉구 시위 등에 참여해 본 적은 있음. 이유는 간단함.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스스로 떳떳해지고 싶어서임. 특히나 위 두 사안은 젠더 갈등(성차별)이나 이념 갈등을 넘어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라고 보기에 참여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어려웠음.
그러나 내가 정말로 그 현장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아마 평생 알 수 없을 것 같음. 왜냐하면 그 이후로도 약자의 아픔이나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냐고 하면,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기 때문임. 시위에 참여하기만 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불편함이 해소될 줄 알았는데, 나는 그저 충동적이고 단발적인 행동으로 잠깐의 효능감만 얻고 끝낸 게 아닌가 싶은 새로운 종류의 죄책감이 느껴짐.
하나 (어이없게도) 위로가 된 건 이태원 참사가 있던 때에 작가는 타 지역에 살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며 유가족분들께 죄송하다고 하는 대목인데, 대체 왜 죄송한 걸까 하는 강렬한 의문과 함께 그 의문이 바로 시위 참여의 본질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음. 불의에 항거하고 탄압에 저항하는 데에 행동한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함께하지 못함에 미안함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이 바로 유토피아를 향한 발걸음의 시작 아닐까. 그러니 ‘동지’라는 표현을 쓰는 게 아닐까.
시위 현장에서 내가 가장 강하게 느꼈던 감정은 다름 아닌 따뜻함이었음.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서 다가오는 안도감과 경외감, 서로가 서로를 돕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신뢰 속에서 그 현장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이자 생명체처럼 느껴졌음. 애써 모른 척하며 지나왔던 다른 시위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함. 단순히 자신의 이득을 외치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가 모두를 지키려는 자리였을 거라고.
결국 ‘데모’라는 단어에 거부감부터 드는 건 그 이면을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임을, 불합리한 탄압에 함께 맞서는 게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님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됨.
3.0 / 5.0
오늘보다 좋았던 어제를 넘어 어제보다 좋은 오늘을 꿈꾸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바라며
25. 01. 18.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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