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가족이 크게 아팠던 때가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에
절망하고 있을 때 내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등을 토닥여주는 기분,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기분.
그들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으나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감사함을 표현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 대신
나도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보기로 했다.
세상 모든 일은 돌고 도니까,
내가 내민 손길이 다른 사람에게 이어지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그러다보면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도
돌아갈 것이라고 믿으며
작년 가을에 처음으로 백혈구헌혈을 했다.
백혈구 헌혈 병원 중
최악이라는 서울성모병원에서 스타트를 끊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렇게 심하게 나쁜 기억은 없다.
빈정 상하는 부분이 없었다고는 못하겠지만
선생님들도 대체로 친절했고
보호자님도 내게 너무 잘해주셨다.
심하게 나쁜 기억이 없다고 말하는 건
다른 병원을 먼저 가보지 않았기에 그럴 수도 있다.
비교군이 없으니 뭐가 안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오늘 건대에서 헌혈해보니
왜 성모가 최악이라는지 조금 알 것 같더라 ㅋㅋ
그래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첫 시작을 성모에서 하길 잘한 것 같다.
어딜 가도 성모보다는 나을 것 아닌가.
서론이 길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년만에 백혈구 헌혈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지정헌혈을 보던 중 A형을 구한다는 글을 보았고
덜컥 공여자로 지원했다.
본인은 프리랜서라 평일에도 시간을 낼 수 있다.
다만 급하게 일정을 잡으면 그 후 며칠 마감 때문에 고생하긴 한다.
그래서 처음엔 9월 초로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번주에 지원한 공여자들이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것이다.
보호자 분께서 이번주에 가능한지 내게 연락을 했고
이번주에 다녀오면 앞으로 4~5일간은 거의 잠도 잘 못 자고
마감지옥에 시달리겠으나...
사정이 딱하여 내가 가기로 했다.
8월 14일(수)에 사전 검사를 했고 적격 판정을 받았다.
8월 16일(금) 오전 9시에 촉진제를 맞고 오후 2시에 헌혈을 하기로 했다.
버스 타고 지하철역까지 20분.
지하철로 1시간 16분.
대기하는 시간까지 치면
대충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
8월 16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밥을 먹고 씻고 반려묘들 밥이랑 물 갈아주고
6시 40분에 집을 나서서
8시 35분에 건대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9층에서 촉진제를 맞고
제산제와 스테로이드 알약 먹었는데...
여기서 의사쌤 덕에 재밌는 일이 있었다.
전공의려나?
많이 젊어 보이는 선생님이 촉진제를 놔줬는데..
나는 살면서 이런 의사 선생님을 처음 봤다.
선생님이 촉진제 주사를 놓은 후
방방 뛰며 활짝 웃으며 물개박수를 치면서
"고맙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어요."
라고 해주셨다.
지금껏 만나본 의사분들은 거의 다
감정표현을 하지 않았고
소울리스 화법을 사용했는데
이 선생님만큼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뭔가... 기분이...
내 안의 무언가가 벅차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보호자분은 그냥 그랬다.
(별로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이 선생님 아니었으면
이번에 백혈구 헌혈한 거 솔직히
좀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되게 허무하게 느꼈을 것 같다.
이 선생님 뿐만 아니라
문진해준 선생님,
헌혈할 때 바늘 꽂아준 선생님도
너무 친절하고 나를 배려해주셔서 좋았다.
이번 백혈구 헌혈은
보호자는 그냥 그랬고..
선생님들 덕에 마음이 너무 좋았다.
내가 분명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
헌혈을 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작년에 백혈구 할 때
보호자님이 고맙다고 20만원 준다고 하셨을 때도
아예 안 받았다.
그리고
나는 위에도 썼지만
내가 받은 걸 갚기 위해 백혈구 헌혈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사람인지라 상대의 태도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이번엔 진짜 선생님들 아니었으면
백혈구 헌혈에 대해 회의감 좀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튼
촉진제를 맞고
지하 1층에서 10시 반까지 책을 읽었다.
새벽 5시에 밥을 먹었기 때문에
점심 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았음에도
배가 꽤 고파서 이른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10시 반에 식사를 위해 세종대로 향했다.
건대병원에서 세종대까지는 1키로 정도 된다.
설렁설렁 걸어서 갔다.
방학이라 학교가 한산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오늘이 졸업식 날이더라.
사람 정말 많았다 ㅋㅋㅋ
그래도 식당은 한산했다.
점심은 세종대 계절밥상에서 먹었다.
예전부터 이 근처를 지나면 꼭 가는 곳이다.
여긴 진짜 특이한게
학기 중에도 외부인 반 학생 반인 곳이고
방학 때는 외부인 밖에 없는 식당이다.
항상 고기 반찬이 많이 나오는데
오늘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성분헌혈을 해야 해서
고기류는 안 먹으려고 했는데
운이 좋았다.
나물 왕창 넣어서 왕창 비벼 먹었다.
밥 먹고 어린이대공원 산책을 했다.
이 때 영상 34도라
공원 내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동물원에 동물도 별로 없었다.
다 실내에서 자고 있더라고..
그래도 꽤나 여유를 느낀 시간이었다.
프리랜서는 프리하지 않다.
항상 바쁘고 시간을 쪼개서 써야 한다.
이렇게 여유롭게 공원 산책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오후 한시 즈음
건대입구로 돌아왔다.
이 때까지 12000보 정도를 찍었다.
당연히 땀에 쩔어 있는 상태였기에
건대입구 롯데 백화점에 가서 티셔츠를 하나 샀다.
화장실에서 물티슈 샤워 후 갈아입고
병원으로 돌아와 1시 45분까지 책을 읽다가
화장실에 다녀온 후 50분에 채혈실로 갔다.
선생님이 몸 괜찮냐고 하셨다.
촉진제 후유증 물어보시는 듯 해서 괜찮다고 했다.
실제로 저번 백혈구 때고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고 후유증 1도 없었다.
(이번에 타이레놀 아예 안 챙겨갔음.)
왼팔은 팔꿈치 안쪽에 꽂았고
오른팔은 하박 중간에 꽂았다.
선생님이 오른팔은 맘대로 움직여도 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티비 틀어줄지 물어보셨는데 괜찮다고 답했다.
(이미 잘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음)
이 대화 이후로 기억이 별로 없다.
진짜 바늘 꽂기 무섭게 잠들었고
2시간 내내 잤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정이었다...)
병원 침대 딱딱하고
자세를 바꿀 수 없어서
허리가 너무 아팠다.
그래도 정말 꿀잠 잤다.
4시에 헌혈을 끝낸 후
오예스 2개와 생수 한병,
그리고 수기 헌혈증을 받았다.
잠에서 덜깬 상태였는데
왜 이리 오예스가 맛있던지 ㅎㅎ
5분간 더 대기하고
선생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후
인사를 하고 채혈실을 나섰다.
병원 지하 1층 뚜레쥬르에서
빵을 하나 조지고
보호자에게 헌혈 끝났다는
문자를 남긴 후 집으로 향했다.
4시 20분 정도에 출발했는데
동네에 오니 6시 30분...
하아 정말 더럽게 멀다.
그나저나
헌혈하는 날은 왜 이렇게 배가 고픈걸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중국집 가서 짜장면 하나 조졌다.
그리고 지금은 배민에서
치킨 하나 주문해놓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곧 올 것 같다. 빨리 마무리해야겠다.)
저번 백혈구 헌혈 때도 그랬고
이번 백혈구 헌혈 때도 그랬지만
헌혈의집에서 헌혈하면 겪지 않아도 될
감정 상하는 포인트들이 몇개씩 있었다.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쓰게 되고
여러모로 백혈구 헌혈은 단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백혈구 수혈을 하는 환자분에게
내가 지푸라기가 되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감동이 있다.
1년에 한 번은 하려고 생각중이니
내년에 또 기회가 되면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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