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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의 체스 대격변 패치, "여왕의 체스"

김첨G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8.06 08:00:02
조회 22575 추천 350 댓글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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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즐기는 온라인 게임들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 간격으로 패치가 이루어지고는 한다.


그렇다면 체스는 어땠을까?


체스의 초기 역사를 살펴보면, 체스는 정말 지독하게 오랜 세월 동안 패치가 없었던 게임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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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도의 체스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아 알기 어렵지만,


적어도 이슬람 전래 시기(9세기경)부터 15세기까지, 체스는 그 형태를 거의 온전히 유지해온 게임이었다.


특히 페르시아 - 아랍 - 유럽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거의 동일한 체스가 500년 가까이 플레이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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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상당 부분 무슬림들의 영향력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이 체스를 페르시아로부터 도입한 뒤 별도의 변형 없이 상당 기간 동안 원형을 유지하며 플레이하였고,


이 체스가 그대로 10세기, 11세기경에 유럽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슬림들이 원작 리스펙에 어찌나 충실했던지, 이들은 대부분의 체스 용어를 번역도 하지 않은 채 페르시아어를 그대로 갖다 쓰고는 했는데,


이로 인해 오늘날의 일부 체스 용어들(룩, 체크메이트)은 여전히 페르시아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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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계에서는 체스를 거의 변형시키지 않은 반면,


유럽인들은 12세기경 일부 마이너 패치를 단행하였는데, 이를테면 이런 패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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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 1.


유럽 전용 스킨이 추가됩니다.


앞으로 코끼리는 비숍, 재상은 퀸의 스킨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물의 성능 변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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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 2.


폰이 첫 이동에 2칸 이동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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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 3.


킹과 퀸(재상)은 첫 이동에 기물을 뛰어넘어 두 칸 이동할 수 있습니다. (King's leap)


(주로 룩을 킹 옆에 배치한 뒤 다음 수에 킹으로 뛰어넘는 방식으로 활용했고, 이것이 이후 캐슬링으로 발전하였음.)





물론, 이것들은 특수룰 수준이었으니 없는 셈 치고 플레이해도 그만이었고,


체스는 이때까지만 해도 페르시아와 유럽 사람이 만나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으로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체스의 1500년 역사상 가장 큰 대규모 패치가 유럽에서 진행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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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퀸과 비숍의 상향 패치였다.



처음에는 그저 로컬룰에 불과했다.


폰 정도의 가치 밖에 지니지 않던 쓰레기 기물 퀸과 비숍이 미친듯이 강화되는 개초딩 로컬룰.



대각선으로 두 칸씩만 이동할 수 있었던 비숍은 대각선 끝까지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고,


대각선으로 한 칸씩만 움직일 수 있던 퀸은 아예 직선과 대각선 끝까지 이동할 수 있는 최강의 능력을 부여받았다.



당대 사람들은 이 변형체스를 가리켜 이렇게 불렀다.


프랑스어로, "ésches de la dame"


스페인어로, "axedrez de la dama"


여왕의 체스, 라는 뜻이다.



이 변형룰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ésches de la dame enragée", 미친 여왕의 체스 라고 경멸적으로 칭하기도 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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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로컬룰의 정확한 발명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당대 유럽에서 체스를 플레이한 주요 지역이었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중 어디 한 곳에서 시작됐다고 추정할 뿐이다.



다만, 그 시기는 어느 정도 좁혀질 수 있는데, 1460년들까지의 자료에서는 '여왕의 체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반면,


1490년부터 이 새로운 변형 체스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470년-1490년 사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 변형룰은 정말 미친듯한 속도로 퍼져나갔다.


새로운 변형룰 '여왕의 체스'를 언급하는 15세기 말, 16세기 초의 문헌들은 전통적 체스와 여왕의 체스를 구분하여 다루고 있는데,


16세기 중엽쯤 되면 아예 문헌들이 전통적 체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체스'라는 단어를 '여왕의 체스'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여왕의 체스'는 유럽 체스의 주요 세계, 스페인·이탈리아·프랑스를 50년 만에 휩쓸고,


16세기 중엽부터는 영국·독일 등 체스 세계의 변방에도 전파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우르프 모드가 너무 인기를 끈 나머지, 아예 소환사의 협곡을 대체해버린 격이다.



이는 매우 오랜 세월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던 게임 치고는 너무나도 빠른 변화 속도였는데,


특히 당대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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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사에서 알아서 패치를 진행하고 패치노트를 올리면 뚝딱인 오늘날의 온라인게임들과는 달리,


15세기에는 중앙집권적으로 패치를 진행할 방도가 없었다.



FIDE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떤 미친 사람이 나서서 전 유럽에 패치노트를 뿌려댈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역간 교류가 오늘날처럼 쉬웠던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 근본없는 로컬룰이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퍼져나갈 수가 있었을까?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는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체스보다 여왕의 체스를 더 재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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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체스는 끔찍하게 느린 게임이었다.


노패치 기준의 체스 1.0 바닐라를 상상해보자.


폰은 한칸씩 찔끔찔끔 움직이고, 비숍은 적을 치려면 한세월을 뛰어가야 하며, 퀸은 사실상 수비 전용 기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룩은 폰 장벽에 막혀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한참 걸리는 기물.


그나마 날렵하게 뛰어다닌다고 할만한 기물이 나이트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놈이 괜히 혼자 말을 타고 다녔던 것이 아니다.)


심지어 폰을 끝까지 밀어 승급을 시킨다 해도, 이 당시 폰은 똥쓰레기 기물인 퀸으로만 변신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체스는 한참동안 서로 폰 구조를 쌓아올리다가 기물들이 한꺼번에 맞붙기 시작하는 형태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게임 속도도 매우 느렸고 무승부 비율도 현재보다 훨씬 높았다.



체크메이트도 몹시 힘들었는데, 비숍과 퀸 없이 체크메이트를 내야 한다고 상상해보면 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게임은 체크메이트 이외의 별개 승리조건인 bare king으로 판가름 났는데,


이는 킹을 제외한 상대방의 기물을 한마리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켜 승리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과정은 몹시 지루하고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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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12세기 유럽에서의 부분적인 룰 개정, 즉 폰의 2칸 이동과 king's leap는 당대 유럽인들이 원하고 있었던 게임의 변화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유럽인들은 줄곧 더 빠른 게임, 더 빠른 체스를 원하고 있었고,


새롭게 등장한 '여왕의 체스'는 그들의 수요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었던 것이다.



여왕의 체스는 체스 메타에 극명한 변화를 가져왔다.


제일 쓸모 없는 기물이었던 비숍과 퀸이 전장에서 가장 공격적인 기물들로 돌변했다.


오늘날의 체스에서 가장 빠르게 상대 진영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이 두 기물이 추가되면서,


체스는 훨씬 더 빠르고, 더 공격적이고, 더 정교한 플레이가 요구되는 게임으로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었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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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스콜라메이트다.


새롭게 변화한 두 기물 '퀸'과 '비숍'에 의해 단 4수만에 가능해진 체크메이트.



스콜라메이트는 여왕의 체스를 다루는 초기 문헌들에서부터 매우 빠르게 주목을 모았다.


여왕의 체스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텍스트 중 하나인 Le Jeu des esches de la dame moralisé(15세기 말 저술 추정)는 벌써부터 스콜라메이트에 대해 언급하며, 놀라워하고 있다.


"비숍에 의해 보호를 받는 퀸에 의해 4번째 차례에 킹이 메이트 당할 수 있다... 설령 킹이 자기 진영에 있더라도."



오늘날에는 너무나도 당연해진 양학원툴의 스콜라메이트가,


당시로서는, 공격적이고 스피디한 새로운 체스의 탄생을 보여주는, 오늘날 '여왕의 체스'의 역사적인 상징이었던 것이다.




양학




출처: 체스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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