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안
비어있는 단 한 사람의 옆자리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창 밖을 보는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한 사람

앉으려다 실수로 커피를 쏟았고
다음 역에 내려 사과하였다
한 가지 부탁도 들어주었다
귀찮지만 나쁠 건 없었으니

냉한의 입술에 핀 온기의 미소
내가 사준 원피스가 무척 맘에 들었던걸까
답례 하겠다며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귀찮지만 나쁠 건 없었으니

마주앉아 자세히 본 창백한 소녀의 얼굴
높은 콧대와 청초한 눈빛
스푼에 맞닿은 부드러운 입술
지금의 나는 꿈을 꾸고있나

식당 밖 그녀의 부드러운 이끌림에
난 그녀의 꿈 속으로 빠져버렸다
현관문이 열리며 시작된 똬리틀기
커튼에 가린 암흑 속에서 열린 전라의 무도회

얼마못가 켜진 불
내 앞엔 하나 뿐인 무도회의 입구와
그 위 분위기에 맞지 않는 애벌레 한 마리가 있었다
그것을 봐버린 나는 눈을 떴고
곧이어 그녀의 꿈은 무너졌다

달콤한 눈물로 가득 찬 웅덩이엔
방금의 애벌레 한 마리가 비춰있었고
청초함 가득했던 그녀의 눈빛은
그 웅덩이 속으로 사라져갔다

지금의 나는 꿈을 꾸고 있나
애석함과 귀찮음으로 뒤덮힌 꿈을
허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
나도 그녀도 분명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악의란 없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