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체조협회, 훈련 중 국가대표 선수에 폭력 쓴 코치 자격 박탈하자
피해 선수 “나와 코치 사이 가르려는 협회 고위직 음모” 주장
‘코치의 폭력’과 ‘협회의 갑질’ 정황 모두 드러나며 양쪽에 비판 여론
일본 정부 ‘직장 내 파와하라 예방대책’ 발표 등 최근 화두에 올라
최근 몇 주 동안 일본에서는 이른바 ‘체조계 파와하라’ 사건이 연일 뉴스에 오르고 있다. ‘파와하라(パワハラ·power harrassment)’는 사회적 위치나 조직 내 지위 등에서 파생된 권력을 부당하게 이용하며 괴롭히는 행위를 지칭하는 신조어다.
이번 사태는 약 한 달 전, 일본체조협회가 훈련 과정에서 선수를 체벌한 코치의 자격을 말소하는 중징계를 내리면서 시작됐다. 일본 내에서는 스포츠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서의 ‘파와하라’에 대한 논의도 재차 화두에 오르고 있다.
선수·코치·협회 모두 엮인 체조계 ‘파와하라’ 사건의 전말
먼저, 사건은 이렇게 진행돼왔다.
8월 15일
일본체조협회가 체조 코치 하야미 유토(34)에게 ‘무기한 코치 등록 말소’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2016 리우올림픽 국가대표 출신 미야카와 사에(18) 선수에게 훈련 중 폭력을 행사한 것이 징계 사유였다.
8월 29일
미야카와 선수가 기자회견을 열어 하야미 코치에 대한 중징계는 자신과 코치를 갈라놓으려는 특정 세력의 ‘파와하라’라며 그 세력으로 쓰카하라 지에코(71) 협회 여자강화본부장과 쓰카하라 미쓰오(70) 협회 부회장 부부를 지목했다.
지에코 본부장은 1968 멕시코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으로 1976년 처음 코치로 취임한 뒤 40년 넘게 체조협회에서 일했다. 미쓰오 부회장은 올림픽에서 메달 5개를 딴 ‘체조영웅’ 출신이다. 이 부부가 지난 수십년 동안 협회 최상단에서 실세로 군림해왔다는 일부 관계자들의 증언은 이전에도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있다.
미야카와 선수는 본부장이 협회가 관여하는 도쿄올림픽 대비 프로그램에 등록하도록 요구하며 “등록하지 않으면 올림픽에 나갈 수 없게 된다”고 위협 발언을 하고, 국가대표 선수들을 위한 내셔널트레이닝센터 사용 제한 등의 불이익을 줬다고 주장했다. 이 프로그램에 등록하면 현 코치와의 계약은 사실상 끊어진다.
또 “약 1년 전까지 머리카락을 당기거나 얻어맞는 등의 행위가 있었다”고 코치의 폭력 일부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괜찮고, 또 코치가 반성하고 있으므로 중징계를 철회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어 “아직 18년 밖에 살지 않았지만,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를 내서 이 자리에 섰다”, “코치와 함께 도쿄올림픽에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같은 날 밤 체조협회는 긴급 성명서를 내고 “선수가 폭력을 허용해도 협회는 그럴 수 없다”며 중징계 유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성명서에 쓰카하라 부부가 중징계 결정에 개입했는지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8월31일~9월 4일
쓰카하라 부부가 미야카와 선수의 ‘파와하라’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부부는 A4 5장 분량의 긴 성명서에서 “올림픽에 나갈 수 없게 된다”는 말은 최근의 성적이나 부상 때문에 못 나갈 수도 있다고 언급한 것일 뿐 협박을 한 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미야카와 선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들이 하나 둘 나오자 이틀 뒤 부부는 태도를 바꿔 “(오해를 산 건) 우리의 잘못이다”, “미야카와 선수에 직접 사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시 이틀 뒤인 4일 미야카와 선수는 “파와하라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사과를 거부한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으로는 하야미 코치의 폭력에 대한 증언들도 함께 나왔다. 40년 동안 스포츠 분야를 취재해온 유명 아나운서 미야지마 야스코는 3일 페이스북에 ‘중징계가 쓰카하라 부부의 음모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적은 글을 올려 화제가 됐다. 해당 코치의 폭력은 이미 몇 년째 문제제기 되어온 것이며, 쓰카하라 부부를 둘러싼 증언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코치의 폭력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내용이었다.9월5일
‘스포츠계의 폭력 관행이 심하다’와 ‘협회 고위직 부부의 전횡을 반성해야 한다’의 두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하야미 코치가 폭력을 행사한 사실을 인정하며 “앞으로 어떤 작은 폭력도 행하지 않겠다”고 사과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어린 시절 받은 폭력이 기초에 있었으며 그런 인식을 가지고 어른이 됐다”, “두드려서라도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했다”는 코치의 고백이 화제가 됐다.9월6일
2015년, 훈련 중 하야미 코치가 미야카와 선수의 머리를 때리는 영상이 공개돼 코치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영상을 제보한 익명의 관계자는 “폭력은 빈번하게 이뤄졌고 선수가 피가 나거나 두통을 호소한 적도 있다”며 코치의 기자회견에서 반성이 느껴지지 않아 영상을 공개했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해당 영상을 단독으로 제공받아 그대로 내보낸 <후지티브이>에 “이미 코치가 폭력을 인정한 상황에서 선수에 상처만 주는 영상을 방송한 것은 적절치 않았다”는 비판도 쏟아지고 있다.
코치의 선수 폭행, 본인이 괜찮다고 하면 ‘폭력’이 아닌 걸까?
이번 사건에는 지금까지 공개되어 온 스포츠계의 여러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어린 선수에게 코치가 폭력을 썼지만, 정작 피해를 입은 선수는 자기는 괜찮다는 입장을 밝혔다. 폭력 코치에 대한 협회의 징계는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이를 협회가 선수에게 압력을 넣기 위한 수단으로 쓴다면 이 역시 선수를 피해자로 만들 수 있는 권력 남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일본 언론은 양쪽이 서로 “상대방이 ‘파와하라’를 이용한다”고 주장하는 현 상황을 두고 “코치에게 폭력 피해 입은 선수가 자신을 지키는 입장에 있는 협회 간부의 ‘파와하라’를 고발하는 이상 사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먼저, 이번 사건은 ‘몸을 쓰는 스포츠계에서의 체벌은 어쩔 수 없다’는 무의식적인 사고에 다시금 의문을 제기했다. “어린 시절 받은 방식대로 훈련시켰다”는 코치의 고백과 “코치를 신뢰한다”는 선수 부모의 말에서도 ‘당연한 폭력’이 대물림되는 흔적이 보인다.
앞서 코치의 훈련 방식을 비판한 미야지마 아나운서는 6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이같은 인식을 재차 비판했다. 미야지마는 “코치의 행동이 ‘파와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미야카와 선수와 부모에게 이런 말을 드리고 싶다”며 “국가대표를 꿈꾸는 어린 운동선수들에게 ‘이런 폭력이 없으면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용납하라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한때 ‘스포츠 영웅’, 수십년 실세 누린 협회 간부의 갑질
하지만 체조계에서는 폭력의 대물림 외에도 미야카와 선수의 고발 덕분에 그동안 묻혀온 쓰카하라 본부장 부부의 ‘위력 행사’가 체조계 밖으로도 드러나게 됐다는 의견들이 많다. 특히 나란히 ‘체조 영웅’이었던 두 사람이 협회를 좌지우지하면서 실제로 체조계 발전에 공헌해온 부분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같은 전횡을 지적하기가 더 어려웠으리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경제지인 <비즈니스 온라인>은 이같은 모습을 대기업을 창업한 회장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지에코 본부장이 현직 코치이던 시절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는 전직 체조선수의 증언도 다층적이고 관행적인 스포츠계의 폭력 문화를 보여준다. 익명을 요구한 이 선수는 <닛칸스포츠>와 한 인터뷰에서 “선수와 떼어놓으려 일부러 코치를 징계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나도 미야카와 선수처럼 밀실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위협으로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지에코 당시 코치가 음식을 줄이고 남자와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등 “오래된 교육 방식을 썼다”며 과도한 통제가 부당하게 느껴질 때에도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 선수는 “세 끼를 다 먹고 공부를 하면서도 운동을 잘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선수들에게 선택이 많아지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쓰카하라 부부에 대한 폭로와 관련해, 일본체조협회는 ‘제3자’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 중이다.
결국 코치와 간부 부부 모두 그동안 ’더 높은 성적’이라는 성과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권력을 이용한 부당한 괴롭힘’을 해왔으며, 이번 일을 계기로 그 폭로들이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고 정리할 수 있다.
‘권력을 이용한 괴롭힘’은 정확히 뭘까?
최근 직장 내 ‘파와하라’ 문제가 특히 더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일본에서는 ‘파와하라’의 기본 특징을 6가지로 본다. 1) 신체적 공격 2) 정신적 공격 3) 인간관계 분리 4) 본래 직위나 업무를 벗어나는 과도한 요구 5) 본래 직위나 업무에 맞지 않는 과소한 요구 6) 개인권 침해 등이다.
직장 갑질 문화 개선을 목표로 하는 블랙기업피해대책변호단 변호사 사사키 료는 이번 사태에 대해 “양쪽 다 ‘파와하라’에 해당된다”고 해석했다. 쓰카하라 부부는 정신적 공격과 인간관계 분리, 개인권 침해를 했고 코치는 ‘가장 악질적인’ 신체적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특히 코치의 경우, 명백한 폭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피해자 본인이 “나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는 점을 지적했다. ‘괜찮지 않은’ 다른 피해자에게 참으라는 분위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누리꾼들도 “코치의 폭력과 본부장 부부의 괴롭힘은 각각 다른 문제다”, “그동안 스포츠라는 이유로 허용된 폭력과 갑질 관행을 바꿔야 한다”며 비판 의견을 내고 있다.
사회 곳곳 ‘파와하라’ 폭로에 일본 정부는 ‘예방 대책’까지
최근 십여 년에 걸쳐 일본 사회에서 권력을 이용한 괴롭힘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면서 후생노동성(한국의 고용노동부)은 지난 3월,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직장에서의 파와하라 예방 대책’ 보고서를 냈다. 피해를 구체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만큼 바로 관련 법이나 조례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정부 차원의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다.
가르치는 선수에게 체벌을 가한 코치의 이야기는 한국으로 배경을 바꿔도 어색하지 않다. 올해 초, 평창동계올림픽을 전후해 심석희 선수 등 여러 선수들을 상습 폭행해 지탄을 받은 한국 쇼트트랙 코치 역시 체벌 이유에 대해 “경기력을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엘리트 체육’의 문제점, 직장 내 갑질이 자주 화두에 오르는 한국에서도 이번 사태의 진행을 눈여겨 볼만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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