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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벙글 소련이 해체된 이유를 알아보자
서론 - 소련의 경제와 붕괴의 서막소련의 경제는 1985년까지 미국의 바로 뒤를 이은 2위였으나, 이건 수치상 GDP일 뿐임.소련은 GDP의 44%를 국방비에 써 가면서 미국의 국방비를 능가했고, 당연히 계획경제 아래에선 이러한 군비 확장 기조에 필요한 중공업 개발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음.일반 국민이 체감하는 소비재 / 경공업 분야에서 소련은 한참 뒤떨어졌고, 소련 지도부도 이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어서 당/군과의 정치적 갈등을 감수하고 개혁을 해보려고 했으나때마침 터진 오일 쇼크는 당시 최대 산유국이던 소련에게 막대한 양의 부를 안겨주었고소련 지도부는 정치적 위험을 내포한 산업 개혁보다는 서방제 소비재와 공장 등을 대거 수입하면서 문제를 뒤로 미루는 최악의 결정을 하게 됨.다들 알다시피 이렇게 뻥튀기된 기름값은 금세 돌아왔고 소련은 대가를 치뤄야만 했음.거기에 체르노빌 사태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안 그래도 돈이 없던 소련의 예산 상황에 새빨간 비상등을 켜줬고당시 막 태동하던 반도체 / 정보 혁명에 소련이 밀릴 것은 뻔한 상황이었음소련도 나름대로 첩보망을 가동해서 미국과 서유럽의 반도체 기술을 빼오고 전자 정부 계획을 세워보기도 하는 등 열심히 시스템에 적용시켜도 봤지만결국 관료주의 특유의 폐쇄성과 기술 수준에 비해 지나친 이상주의 때문에 이러한 계획은 모조리 실패하고 1988년에 한창 버블 시대를 달리던 일본에게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넘겨주게 됨.여기에 고르바초프가 내세운 뻬례스뜨로이까 / 글라스노스찌 / 데모끄라찌야 정책은 안 그래도 반소련 민족주의 정서가 팽배해 있던 발트 3국에 기름을 부었음.발트 3국은 소련 창립 멤버가 아니라 스탈린 시절에 강제 병합당했기 때문에 원래부터 반소 감정이 있었으며,경제 침체와 사회 전반적으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은 이러한 감정에 불을 붙였다고 볼 수 있음.사진은 1989년에 이뤄진 '발트의 길' 시위로, 무려 200만명이 참여함. 이 지역 인구수가 400만명 정도였으니 거의 절반이 참여한거임.소련 내 다른 공화국들도 자치권 확대 여론이 강해지고 있었지만, 발트 3국은 원래 독립국이었던 데다가 북유럽과 가까웠던 점, 산업 기반이 굉장히 튼튼했던 점, 반소 감정이 심했던 점이 달랐음.결국 90년 3월에 리투아니아가 먼저 독립을 선포하면서 소련 붕괴의 서막이 시작됨소련은 체코와 헝가리에서 하던 것처럼 무력으로 진압을 시도해 봤지만 개판 5분 전의 통제력과 국제사회의 비난이 무서워서 제한적 개입만 했음그리고 소련이 아무것도 못하는 걸 본 다른 공화국들, 특히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원수진 캅카스 지역과 인종 자체가 다른 몰도바 지역에서 분리독립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함여기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회의 의장인 옐친게이가 주권을 선언하는 짓을 저지름소련 = 러시아가 아니라, 소련에 러시아가 포함되어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연방 중앙정부의 권위를 개박살낸 사건이었고,당연히 연방 수장인 고르바초프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었음.그리하여 고르바초프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묘수를 두는데...1. 전연방 국민투표 실시소련 유지 투표에 관하여1991년 3월 17일당신은 소련을 각 공화국들이 동등하게 주권을 가진, 새롭게 개혁된 연맹으로서 유지하는 것이 각 공화국 인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라 생각하는가?예 / 아니오이 투표는 고르바초프와 소련 최고 평의회가 의도적으로 모호히 설계했는데 먼저 '새롭게 개혁된 연맹' '각 공화국들의 동등한 주권' 같은 용어는 뚜렷한 법적, 정치적 정의가 결여되어 있었고어떻게든 소련 해체만은 막으려 했던 고르바초프부터 독립에 가까운 주권을 원했던 각 공화국의 지도자들까지, 그야말로 소련 내 모든 정치 세력이 지 꼴리는대로 해석할 여지를 남겼음저 투표지는 러시아에서 진행된 투표지고 각 공화국에서는 해당 공화국 언어에 맞게 번역되어 투표가 시행되었는데, 예를 들어카자흐스탄에서는 '각 공화국들이 동등히 주권을 가진' 이라는 부분을 '각 주권 국가가 동등한' 이라고 번역해서 새로운 연방의 성격을 느슨한 국가연합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놨고우크라이나에서는 아예 추가 투표지를 배부해서 '우크라이나가 우크라이나 국가 주권 선언에 기초하여 소비에트 주권 국가 연합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것에 대해 동의하는가'의 질문을 넣기도 했음.이 질문은 우크라이나에서 81.7%의 찬성률을 보였는데, 우크라이나인들이 연방에 남더라도 사실상 주권 국가로 기능하고 싶었음을 보여주고 있음.사실상 투표는 연방 유지파와 고르바초프의 압도적 승리로 끝난듯 했으나....저건 오판이었음저러한 투표의 실시 자체가 '국민이 직접 투표로 국가의 운명을 정한다'는 민주적 절차 자체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고,각 공화국별로 투표 결과를 집계했기 때문에 연방 전체의 통합된 의견이라기 보다는 각 공화국들의 개별적 의사가 더욱 부각되었음. 그리고 저 국민투표가 시행되던 날, 옐친은 러시아 내의 대통령 직선제를 밀어붙임에 따라 역설적으로 고르바초프를 능가하는 민주적 정당성을 갖게 됨.2. 고르바초프의 신연방조약이런 작태가 계속되자 고르바초프는 신연방조약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고, 원래는 국민투표에서 보듯 '새롭게 개혁된 연맹' 안을 밀어붙이려고 했으나 각 공화국들, 특히 옐친에게 정치적으로 밀려서 각 공화국의 주권을 대폭 인정하는 '주권 국가 연맹'안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음.90년 11월, 국명에서 사회주의를 제거한 '주권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уверенных Республик - СССР)' 초안이 처음 공개되었고,각 공화국들이 사회주의를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명시한 파격적인 대우였음.91년 봄부터 모스크바 근교 소련 대통령 별장에서 협상이 시작됨.4월 23일, 고르바초프와 9개 공화국 수반은 9+1 합의를 체결하며 돌파구를 마련하는 듯 했으나,실제로는 옐친이 일방적으로 고르바초프의 정치력을 갉아먹는 과정이었음.협상이 진행될수록 조약은 중앙의 권한을 줄이고 공화국의 권한을 늘리는 방향으로 점차 수정되었음.그리고 8월 15일에 최종 조약안이 발표됨.국방, 예산, 통화발행, 핵무기 발사권한 등 핵심적인 요소 빼고 모든 자치권 (심지어 연방에서 탈퇴할 권리마저) 을 각 공화국에 부여하는 내용이었고,91년 8월 20일에 서명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완전한 독립을 원하던 민족주의자들과 공산당 보수파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한 그런 조약이었음.3. 8월 쿠데타, 그리고 실패8월 18일, KGB를 위시로 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대표단이 크림반도에서 휴가 중이던 고르바초프를 가택연금함.8월 19일, 고르바초프의 건강 악화라는 핑계를 대며 비상사태를 선포함.그러나 쿠데타는 3일만에 진압됐는데(의사당 앞에서 연설하는 옐가놈의 모습. 이새끼는 98년에 의사당에 탱크 포격을 한다)일단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대통령인 옐친부터가 반헌법적 내란이라고 규정했을 뿐더러이런 옐친의 모습에 수십만 모스크바 시민이 붉은 광장에 모여서 탱크를 막고 일부 사병들은 시민 편으로 합류하기도 함결국 21일에 쿠데타 세력은 완전히 운지해 버렸고 22일에 모스크바로 고르바초프가 돌아오긴 했으나...쿠데타를 막아낸 건 무능한 고르바초프가 아니라 러시아의 희망 옐친이다!! 는 이미지가 생기며 고르바초프의 정치 생명은 완전히 끝장났고군부와 KGB가 자기네 직속 사단 하나 통제 못 하는게 만천하에 드러나며 각 공화국들이 연방 중앙의 통제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낳았음결국 쿠데타 실패 후 각 공화국들은 연쇄적으로 독립을 선포했고옐친은 고르바초프 몰래 벨라루스-우크라이나와 함께 벨라베자 조약을 체결하며 소련을 확고히 붕괴시킴.
작성자 : Mullvad고정닉
주의) 오싹오싹 미국 최악의 흑역사 - 인민사원 사건
짐 존스라는 1931년에 태어난 남자가 있었음그는 젊은시절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되어 이를 바탕으로 민간단체를 설립함해당 민간단체는 인종갈등이 만연하였던 60~70년대의 미국의 불안정한 사회정세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종의 사람들을 차별없이 받아주고 다같이 기도를 하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선한 단체로 보였음그렇게 인디애나주의 작은 교회에서 시작한 민간단체는 얼마안가 LA로 이사가 여러개의 지부들을 만드는등 서서히 그 규모를 늘리기 시작함그러나 그 과정에서 언론에 의해 이 민간단체의 실상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특히나 교주인 짐 존스의 평소 도덕적 행실에 대해 여러 문제점들이 지적받기 시작하며 심지어는 정부의 개입까지 들어갈 조짐이 보였음그러자 짐 존스는 한가지 수를 두는데, 바로 타국으로 단체의 거점을 옮기는 거였음. 여러곳이 후보지로 지정된 가운데 남미에 있지만 영어를 써서 소통이 간편하며, 상대적으로 땅값이 쌌던 나라 가이아나에 지부를 건설하기로 결정함가이아나 정부는 당시 베네수엘라와의 국경 갈등으로 인해 문제를 빚고 있었는데, 여기에 갑자기 외교적으로 천룡인 취급 받는 미국인들이 제발로 자기네들 땅으로 들어오겠다고 하니 정부는 두팔 벌려 환영해줌이쯤에서 단체는 이름을 바꿔 거의 종교로 탈바꿈함. 일명 The People's Temple. 즉 인민사원이라는 뜻임. 그리고 가이아나의 해당 지부는 존스타운이라고 명명됨존스타운은 “겉보기에는” 아주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듯 했음기자들 몇명이 파견나가 교민들한테 여기 살기 어떠냐고 물어보니 거의 단체로 최면에라도 걸린듯 모두 “살기좋다”는 답변을 반복했음. 이들이 떠나고 싶어도 삼엄한 경비들에 의해 불가능하다는 소문이 돈다고 묻자 교민들은 모두 루머라고 부정했고, “자신들이 원할때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답변을 남김.그러나 실제로 교민들은 경비들에 의해 이곳에 사실상 감금된것이 맞았음. 대부분의 교민들이 더이상 짐 존스의 정신나간 교리와 행적에 동의하지 않기 시작하자, 존스는 경비들을 늘려 아예 이곳을 못빠져나가게 만듬. 사실상 하나의 폐쇠적인 국가를 만들어버린셈임한편 존스의 기행은 계속되었음. 한번은 교민들 모두에게 음료수인 쿨에이드를 독약이라 말하고 강제로 마시게 만들었는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건 모두 자신의 은혜덕이라는등 이상한 말을 했다고함.그렇게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져가던 존스타운을 미국땅에서 눈여겨보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민주당 상원의원인 레오 라이언이었음. 그는 존스타운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겼고 이에 약간의 파견단을 꾸려 가이아나로 떠나 그곳의 실체를 파해치기로 함.사원 내부로 들어간 그는 역시나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했는데, 설상가상으로 한 교민이 그에게 제발 살려달라는 내용의 쪽지를 전달해버림. 결국 모든것을 깨달은 라이언 의원은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 실상을 까발리기로 결정함그리고 여기서 최악의 참사가 벌어지고 마는데...당시 존스 또한 라이언이 자신의 정체를 까발리러 떠나려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상태였고, 이에 경비들을 불러 그들을 사살하라는 결정을 내림. 비행기에 막 올라타려던 라이언 의원은 결국 경비들에게 총으로 살해당하고 맒자국의 상원의원이 타국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얼마안가 전해지자 당연히 미국 정부는 개빡쳤고 얼마안가 존스타운을 습격할 작전을 내림.궁지에 몰린 짐 존스는 결국 최악중에서도 최악의 수를 내버리고 맒.그는 얼마안가 존스타운의 교민들을 모두 불러들여 그들을 천국으로 보내줄테니 자신이 주는 음료수를 마시라고 지시함. 이걸 마시면 자신과 함께 천국으로 따라갈거라는 말을 했음그 음료수는 바로 청산가리가 든 독약이었고 당연히 경악한 교민들은 마시기를 거부함. 그러나 경비들의 강요에 의해 대다수의 교민들이 어쩔 수 없이 이를 마시었고 결과는 결국 예상가능하다시피, 수백명의 죽음이었음.이런 개미친 학살극을 벌인 직후 존스 또한 권총으로 자x함.뒤늦게 도착한 미정부는 말그대로 살육의 현장에 그야말로 경악하고 말았음. 사람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고, 그것도 수많은 아이들의 사체 또한 예외가 아니었음.일부 사건이 일어나기전 숨거나 도주한 생존자들을 제외하면, 당시 존스타운에 있던 모든 교민들, 무려 918명이 전멸하여 버림.비록 타국땅인 가이아나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상술했듯 인민사원의 교민들은 모두 미국인들이었기에, 이 사건은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많은 미국인들이 한번에 목숨을 잃은 사건으로 남게됨.현재 가이아나 존스타운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작은 추모비 하나만이 설립되어 있다고 전해짐.
작성자 : Schizo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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