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한국사회 주류라고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군부통치가 지속하던 80년대뿐만이 아니라 민주화의 기점으로 여겨지는 87년 이후에도 그 사회적 통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1987년 대선에서 'YS-DJ 단일화'는 민주진보세력이 군부세력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1992년 대선에서 기득권 세력에 '투항'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던 YS 정권도 주류는 아니었다. 하물며 IMF 시기 특수상황에서 치러진 1997년 대선에서도 DJ는 JP와 'DJP 연대'를 구축하고 나서야 정권교체에 성공할 수 있었다. 참여정부에서도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탄핵 위기에 내몰릴 만큼 민주진보세력의 기반은 취약했고 보수 기득권의 위세는 막강했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152석, 민주노동당 10석 등 민주진보계열이 과반을 훌쩍 넘어서기도 했지만, 불과 2년 만인 2006년 지방선거에서 기초·광역단체장을 막론하고 한나라당이 '싹쓸이'할 정도로 민주진보세력의 정치적 기반은 여전히 취약했다. MB정부 시기에도 보수 기득권은 여전했다.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153석, 자유선진당 18석, 친박연대 14석, 한나라당계 무소속 16석까지 보수계열 의석수는 201석에 달했다. 민주진보계열은 민주당 81석, 민주노동당 5석, 창조한국당 3석, 민주당계 무소속 9석 등 제3지대 의석까지 모두 '영끌'하고도 고작 98석에 불과했다. 19대 총선에서는 '정권심판' 바람이 거세게 확산하는 와중에도 보수여당 152석 단독과반이 유지됐다.

'주류의 주류'였던 민자당 정권, '주류의 비주류'였던 YS정권, '비주류의 주류'였던 DJ정권, '비주류의 비주류'였던 노무현 정권을 거쳐, '주류의 비주류'였던 MB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 보수 기득권은 강고했고, 보수가 한국사회 주류라는 믿음에는 일말의 의심조차 성립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보수 기득권이 흔들리기 시작한 계기는 '주류의 주류'였던 박근혜 정권에서 비롯됐다. 박근혜 정권은 앞선 정권들과 달리 비주류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권력은 독점되고, 소통은 단절이 됐다. '친박'을 넘어 '진박'과 '찐박'이 난무했다. 20대 총선에서 민주당과 분당한 '안철수당'이 무려 38석을 가져가는 와중에도 민주당은 123석을 차지했고, 새누리당은 122석에 그쳤다. '진박' 공천의 결과였다. 대통령은 의회권력이 아니라 시민들에 의해 탄핵을 당하고, 한국사회 정치지형은 보수 기득권을 와해하고 주류와 비주류의 정치적 포지션을 바꿔놓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권력을 독점하고, 소통을 단절하고, 비주류를 허용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사상 최대 557만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21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180석, 미래통합당 103석으로 코로나 특수성을 참작하더라도 선거 사상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 총선의 결과는 열린우리당 바람이 불었던 17대 총선의 재현이라기보다, 18대 총선의 정반대 결과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정치지형상 의미는 더 깊었다.

흥미롭게도 이후 '단일화' 승리공식은 민주진보계열이 아니라 보수정당에서 나타났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에서 오세훈은 안철수와 '단일화'하고 당선이 됐다. 이듬해 2022년 대선에서는 윤석열은 안철수와 '단일화'를 하고서 당선이 됐다. 김대중-김종필, 노무현-정몽준 사례에서와같이 민주진보계열 고유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단일화' 필승공식이 이제는 보수계열의 필수공식이 된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 정치지형상 주류가 교체되었다는 충분한 상징이다.

이번 총선은 그런 와중에 치러졌다. 범야권 192석, 국힘 108석 결과는 숫자상으로 21대 총선의 재현을 보여주지만, 그 진행 과정은 20대 총선과도 묘하게 닮아있다. 권력이 독점되고, 소통이 단절되고, '완장'들이 난무하는 순간, 이 정치지형이 또 어떤 지각변동을 가져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