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올림-
훌륭한 체스 실력은 오랫동안 일반적인 지능의 척도로 여겨져 왔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 기분좋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 잘못된 견해이다. 하지만 일단 내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러스킨-거트만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해보자: “학습의 과정과 습득된 능력을 객관적이고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분석적 기술을 이용해 비교연구를 하기에 체스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연구실과 같다”.
러스킨-거트만과 이유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위의 주장에 대해서는 나 또한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인공지능보다는 인간의 지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데에 체스를 연구실로 사용하는 데에 훨씬 관심이 많다. 나의 2007년 저서, “어떻게 인생이 체스를 모방하는가(How Life Imitates Chess)”에 적었듯이 “체스는 인간의 정신세계 안에서 예술과 과학이 만나 경험을 통해 정제되고 발전되는 독특한 연결지점이다”. 우연찮게도 이 인용문이 들어 있는 장의 제목은 “은유 그 이상(More than a metaphor)”였다. 그 장의 목적은 체스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을 이용해 체스 이외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행하는 의사결정 과정을 이해하고 발전시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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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인공적인 지능을 탐구하는 데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체스 컴퓨터들과 그렇게 많은 대국을 펼친 것도 이 탐구에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인간 체스선수를 위협하고, 곧 추월한 그 결정적인 기간 동안에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나에겐 행운(어쩌면 불행)이었다.1994년 이전, 그리고 2004년 이후에는 인간과 컴퓨터 사이의 대결에 별 관심들이 없었다. 컴퓨터는 순식간에 너무 약한 상대에서 너무 강한 상대로 바꼈다. 하지만 그 사이 10년 동안 기계의 연산 능력과 그랜드 마스터의 직관과 지식 사이의 대결은 황홀한 것이었다(물론 우리는 기계의 연산 능력 뒤에는 “인간” 프로그래머들의 지혜가 숨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체스에서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가장 약한 부분에 기계가 강하고 또 반대로 기계가 가장 약한 부분에 사람이 강하다. 라스킨-거트만은 이를 모라벡의 파라독스(Moravec’s Paradox)으로 설명한다[역자주: 모라벡의 파라독스는 인공지능 연구에 있어 인간의 지능 중 논리와 계산 같은 이성적인 부분은 의외로 거의 계산 능력(computational power)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감각운동기능(sensorimotor skills)과 같은 동물적인 본능은 오히려 엄청난 양의 계산을 필요로 한다는 파라독스이다]. 여기에서 얻은 실험 아이디어가 있다. 사람이 컴퓨터와 대결하는 대신에 짝을 지어 체스를 두면 어떨까? 나의 아이디어는 1998년, 스페인 레옹에서 “고급 체스(advanced chess)”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었다. 각각의 선수는 자신이 선택한 체스 소프트웨어를 실행하는 컴퓨터를 1대씩 사용해서 게임에 임했다. 목표는 인간과 기계의 능력을 조합해서 지금껏 아무도 본 적 없는 최고 수준의 체스 경기를 펼쳐 보는 것이었다.
이 특이한 경기 형태에 나름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세계 1위였던 불가리아 출신 베셀린 토팔로프(Veselin Topalov)와의 대국은 이상한 느낌으로 가득차 있었다. 게임 도중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흥미진진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편하기도 했다. 수백만개의 기보를 순식간에 검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경우의 수가 잘 정리되어 있는 게임의 오프닝을 위해 보통의 게임때만큼 기억력을 쥐어짤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기력의 우위는 여전히 누가 언제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느냐에 달려 있었다.
컴퓨터 파트너가 있어서 좋았던 점 또 하나는 결코 전술적인 실수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우리가 검토한 모든 수에 대해서 우리가 깜빡 놓쳤을지도 모르는 가능한 결과와 상대방의 응수를 보여줬다. 일단 이런 걱정을 덜고 나니까, 우리는 둘 다 전술적 계산에 시간을 소모하는 대신 전략적 차원의 생각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 아래서는 인간의 창의력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인간과 컴퓨터의 좋은 점만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팔로프와 내가 둔 게임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임은 한 수당 시간 제한을 둔 채 진행됐고, 따라서 반도체 파트너와 상의하라 시간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주목할만 했다. 이 게임에 1달 앞서 “보통”의 스피드 대국에서 나는 토팔로프를 4-0으로 물리쳤었다. “고급”체스 경기의 결과는 3-3 무승부였다. 전술적인 계산에서 내가 가졌던 우위가 컴퓨터에 의해 무력화된 것이다.
러스킨-거트만은 이 실험을 언급하지 않는데, 그가 다루는 주제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인 만큼 중대한 누락이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이 “고급”체스가 그 뒤로도 계속됐다는 것이다. 2005년에 온라인 체스 사이트인 Playchess.com에서 “프리스타일” 체스 토너먼트를 개최했다. 여기에는 누구든 다른 인간 선수 혹은 컴퓨터 프로그램과 팀을 이루어서 참가할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온라인 사이트들은 선수들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속이는 것을 방지하거나 최소한 억제하기 위해서 “속임수 방지(anti-cheating)” 알고리즘을 이용하곤 한다(나는 매 수를 진단/분석하고 확률을 계산하는 이 속임수 방지 알고리즘들 역시 속임수로 사용되는 체스 프로그램들만큼이나 “지능적인”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상당액의 상금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몇몇 팀의 강한 그랜드마스터들이 컴퓨터 여러 대를 동시에 이용하는 팀을 짜서 토너먼트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결과가 예측가능해보였다. 인간과 컴퓨터가 결합한 팀에 가장 강력한 체스 프로그램을 물리쳤다. 딥 블루(Deep Blue)와 마찬가지로 체스만을 위해 만들어진 슈퍼컴퓨터 히드라(Hydra)마저 상대적으로 약한 랩탑을 이용하는 강한 실력의 인간 선수에게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인간의 전략적 사고와 컴퓨터의 전술적 정확도의 결합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은 토너먼트가 끝날 때 쯤 일어났다. 토너먼트의 승자는 최첨단 컴퓨터를 이용한 그랜드마스터가 아니라 3대의 컴퓨터를 동시에 사용한 두 명의 미국 아마츄어들이었다. 이들은 컴퓨터를 조작하고 판세를 깊이있게 들여다보도록 프로그램을 “훈련시키는” 기술로서 상대인 그랜드마스터가 가진 체스에 대한 더 높은 통찰력과 다른 선수들이 가졌던 더 많은 연산 능력(computational power)를 효과적으로 물리쳤다. 약한 인간 + 기계 + 우월한 방법론이 강한 컴퓨터 한 대보다 나았음은 물론이고 놀랍게도 강한 인간 + 기계 + 열등한 방법론보다도 나았던 것이다.
이 “프리스타일” 토너먼트의 결과는 “재능(talent)”이 오용되고 오해된 개념이라는 나의 믿음과 맞아떨어진다. 1985년 내가 사상 최연소 22세의 나이로 세계 챔피언이 되었을 때, 나에게는 성공의 비밀과 재능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자들은 시실리언 방어(Sicillian Defense)에 대해 묻는 대신 내 식습관, 내 개인사, 내가 몇 수 앞까지나 읽는지, 그리고 몇 게임이나 복기할 수 있는지 등을 물어왔다.
내 대답이 그들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음을 깨닫는데는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식습관은 평이하다.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열심히 했다. 내 기억력은 좋은 편이지만 첫 보기만 하면 뭐든지 기억하는 수준(photographic memory)은 아니다. 그랜드 마스터는 몇 수 앞까지 읽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러스킨-거트만이 위대한 쿠바 출신 챔피언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José Raúl Capablanca)의 말로 알려진 대답을 잘 인용하고 있다: “딱 한 수, 최상의 한 수”(다른 사람의 말로 알려져있기도 하지만). 사실 이 대답이나 다른 답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 뭔가 깊이있어보이는 질문을 하려다가 실패한 문외한의 시도를 함축적으로 무시하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한테 뚜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를 완주하는 동안 기어를 몇 번 바꿨냐고 묻는 것과 같달까.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대답, 즉 “판 위의 형세와 시간이 얼마나 남았냐에 따라 다르다”는 답은 썩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내가 치룬 가장 성공적인 토너먼트 게임 중 하나로 기억되는 1999년 네덜란드 후고벤스(Hoogovens)에서의 경기에서 나는 15수 앞에서 이기는 수를 읽었다. 흔치 않은 일이다. 나는 최종 공격을 위해 내 말을 엄청나게 희생했고, 스스로 퇴로를 잘랐다. 만약 내 계산이 틀렸다면 완패가 따논 당상인 게임이었다. 비록 내 직관이 맞아 떨어졌고 당시 내 상대(공교롭게도 또 토팔로프)가 압박감에 못이겨 방어책을 찾는 데 실패하기는 했지만, 게임이 끝나고 분석해보니 내가 그렇게 엄청난 노력을 경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둔 수보다 훨씬 간단하게 승리하는 방법이 있었다. 카파블랑카의 빈정댐은 차치하고서라도 인간이 두는 체스 게임, 그리고 나아가서 사람의 의사 결정에 있어서는 몇 개 안되는 수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 컴퓨터처럼 점점 더 깊게, 점점 더 많은 수를 체계적으로 내다보는 것보다 일반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사람마다 장기 기억력이나 공간시각능력과 같이 체스 선수들이 이용하는 인지능력에 차이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체스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연구실”이자 “독특한 연결지점”인 이유는 체스를 위해 활동이 요구되는 두뇌의 제기능이 매우 많다는 데에 있다. 뇌에 대한 연구가 실질적인 차원에서 종종 실패하는 것은 체스를 배우고 두는 과정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이나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재능이다. 몇 시간 동안 공부를 계속해도 새로운 지식을 계속해서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은 재능이다. 자신의 의가 셜정 과정과 결과를 분석해서 스스로를 잘 프로그램하면 마치 더 좋은 체스 프로그램이 같은 컴퓨터에서 실행되는 다른 프로그램보다 체스를 더 잘 두는 것과 같이 스스로의 결과물을 향상시킬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드웨어는 바꿀 수 없을 지 몰라도, 소프트웨어는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것이다.
체스 컴퓨터들의 우위가 분명해지고 인간 대 기계의 대결이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20세기의 위대한 두뇌들을 컴퓨터 체스에 매료시킨 바로 그 원래의 목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지도 모른다. 단순히 컴퓨터가 체스를 더 잘 두게 하는 문제 또한 그들이 풀고 싶어 했던 문제이고, 또 풀어 냈다. 하지만 다른 목표들도 있었다: 인간처럼 생각하면서 체스를 두는 프로그램, 혹은 심지어 인간처럼 체스를 배우는 프로그램. 지금 우리가 하고 있듯이 점점 더 빠른 하드웨어에서 돌아가는 점점 더 빠른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보다는 이런 목표들이 훨씬 더 결실있는 탐구의 대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지막 체스 비유(chess metaphor)는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혁신과 창의력을 버리고 판매가능한 상품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데에만 멈췄는가에 대한 비유.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간 정신을 상징하는 게임을 할 수 있는 인공 지능을 만들겠다는 꿈은 버려졌다. 대신 매년 새로운 체스 프로그램이, 새로운 버전이 쏟아져 나온다. 전부 다 1960년대, 70년대에 개발된 수백만가지의 경우의 수 중 한 개의 수를 찾는 똑같은 프로그램상의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
기술은 넘쳐나지만 혁신은 부족인 현대 사회의 모든 물건과 마찬가지로, 체스 컴퓨터 또한 점진주의와 시장의 수요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억지(brute-force) 계산력을 이용한 프로그램들이 체스를 제일 잘 두더라, 왜 다른 기술을 고민해? 이미 잘 작동하는 기술이 있는데 왜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 실험하는 데 돈을 낭비해? 과학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에 기겁을 해야 맞겠지만, 현실은 이것이 정상인 것으로 보인다. 가장 뛰어난 두뇌들은 진짜 공학이 아닌 금융 공학을 택해 버렸고, 그 결과는 양쪽 모두에 재앙이었다.
아마 체스는 이 시점에서 [인공지능 연구에] 적합한 게임이 아닌지도 모른다. 요즘 뜨는 건 포커다. 아마츄어 플레이어들이 종이 한 장에 규칙을 설명할 수 있는 복잡도의 카드 게임으로 백만장자가 되고 티비에 출연하는 꿈을 꾼다. 체스가 100% 정보가 공개된 게임이고 – 두 플레이어 모두 게임에 대한 모든 자료를 공유하고 있다 – 따라서 연산 능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임인데 반해서 포커에는 숨겨진 카드와 가변적인 위험이 존재하고 따라서 운, 블러핑, 위기 관리(risk management)와 같은 것들이 필수적이다.
포커에는 오직 인간 심리에만 바탕을 둔, 따라서 컴퓨터가 침투하기 어려운 어떤 면들이 존재할런지도 모른다. 컴퓨터로 매 핸드의 승률을 계산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일테다. 하지만 승률이 낮은 패를 들고도 높은 판돈을 거는 상대 플레이어에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그런데 사실 포커에서도 컴퓨터들은 이미 발전하기 시작했다. 체커를 풀어버린 프로그램을 개발한 조나단 섀퍼(Jonathan Schaffer)가 이제는 포커로 공격대상을 바꿨고, 그가 만든 디지털 플레이어들은 점점 더 강한 인간 플레이어를 상대로 점점 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것이 온라인 도박 사이트에 가지는 함축적인 의미는 분명하다.
많은 프로 체스 선수들이 돈벌이가 더 잘 되는 포커를 플레이하며 소일하고 있는 작금의 현상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들이 혁신을 위해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가 즐기는 고등한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위기를 감수해야 하는지를 배우기에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가 위기를 감수하지 않고는 어떤 보상도 누릴 수 없다는 교훈을 얻기 위해 포커에 엄청 뛰어난 슈퍼컴퓨터가 필요하다면, 뭐 그리 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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