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과거의 명인들이 오늘날의 아마추어 강자보다 약하다고까지 생각진 않습니다만, 기사라는 동격의 타이틀로 비교한다면 과거의 기사들보단 현대 기사들의 기력이 조금이라도 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바둑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집적 지식’으로 독점화되어 왔습니다. 혼인보니 본인방이나 하는 바둑 가문의 존재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아무나 열람할 수 있는 기보이지만 당대에는 일정 수준에 도달한 기사이거나 가문의 허락을 받는 소수들만이 고수의 수법을 엿볼 수 있었겠지요. 제가 알기론 일본이 세계바둑을 호령하던 현대바둑의 초창기까지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었습니다. 바둑 후진국이었던 한국의 젊은 기사들은 아무나 열람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기보를 접하고 또 그 수준의 대국을 경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었지요. 한동안은 일본 유학만이 최고에 오르는 길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소수들 사이에서만 고급정보가 유통되는 상황이 불과 수십여 년 전까지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 현대에 이를수록 정보 공개가 불가피해졌으나 이 역시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주일에 이르기까지 기보를 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대다수였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의 이런 상황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특정 가문이나 도장에는 ‘준비된 수순’ ‘연구된 신수’들이 존재했고 그것이 승패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급 정보들은 소수 사이에서 유통되었기에 오늘날의 그것에 비해 제한적이고 단편적일 가능성이 높다.’

  현대 바둑의 ‘집단연구’와 ‘실시간 정보공유’는 고급정보의 원활한 유통은 물론 정보의 질적 진화 속도를 개선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기사들에 비해 현대 기사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현대 기사들은 슈샤쿠 시대의 거의 모든 기보들은 물론이고 오청원 시대의 거의 모든 기보에다가 현대 바둑의 기보들까지 섭렵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수많은 기보 연구에 바탕한 것이 바로 ‘신수’와 ‘신형’이라고 불리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각국의 최정상들이 격돌하는 국제기전이 많아지는 만큼 수준 높은 대국 역시 점차 늘어나고 있고 그에 비례해서 ‘통렬한 신수’들 역시 더 많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신수들은 물론 과거 명국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서 과거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을 재해석하고 더 좋은 수를 발견해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수이지요.

  결국 엄밀하게 객관적인 정황으로만 판단할 때 과거의 기사가 현대의 기사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자기 시대의 거의 모든 기보와 후대에 두어진 대부분의 기보를 모두 섭렵해야 합니다. 과거의 그들이 현대 기사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지 않은 이상(현대의 모든 수준급 기사들은 최소한 10년 넘게 이 과정을 거쳐 탄생하니까요), 오청원 기성이 말씀하신 몇 개월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오늘 날의 신수는 ‘집단 두뇌를 통한 검증’의 과정을 거치기까지 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정석에서도 아직까지 신수가 등장하고 집단연구를 통해 평가되며 개량되어 정보의 양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길게는 수십 년씩 지속하고 있는 현대의 최정상급 기사들과 제한된 정보만을 독점하고 있던 과거의 기사를 동급으로 보는 것은 ‘과거의 기사들이 현대의 기사들에 비해 탁월한 바둑지능을 가졌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겠지요. 반대로 말하자면 훨씬 더 많은 고급정보들을 접하고 집단 두뇌를 통해 검증하기까지 하며 훨씬 더 많은 신수에 대한 정보를 보유한 현대 기사들이 더 잘 두지 못한다면 그건 지금 기사들이 과거 기사들에 비해 바둑 지능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애초의 기재가 비슷한 수준이라고 가정한다면, 후대에 태어난 덕분에 수많은 이점을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현대 기사들의 바둑 실력이 조금이라도 더 강하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