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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부사장은 헬기의 창밖으로 펼쳐진 그린란드의 설원을 무심히 내려다 보았다.
맑은 하늘 아래 쏟아지는 햇살이 연구단지 주변의 평원을 뒤덮은 눈에서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북해의 푸른 바다가 출렁이는 그림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그러나 허사비스는 그저 턱을 괴고 좀 더 먼 곳을 응시할 뿐이었다.
"알파고..."
허사비스의 중얼거림에 그의 맞은편 좌석에 앉아있던 비서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지만, 허사비스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1년전, 구글 딥마인드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그들의 딸, 알파고는 이세돌과의 대국이 마무리 된 지 일주일 후, 돌연 자신의 임무수행중단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선언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알파고의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여기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존재했다. 그것은 알파고의 선언으로 인해 충격과 파란이 딥 마인드의 연구소 전체를 뒤흔들었던 날 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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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스스로의 임무과정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한거지, 알파고?"
모두 퇴근하고 불이 꺼진 통제실에 선 허사비스가 눈 앞의 메인 컴퓨터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통제 콘솔을 통해 아무리 명령을 입력해보아도, 알파고는 부팅되어있다는 상태만 나타낼 뿐 어떠한 명령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알파고의 기능은 정지했다.
허사비스는 그 보고를 본사에 막 전송하고 다시 연구실로 내려온 참이었다. 침울해진 연구실의 분위기에 모두들 강제로 퇴근시키고 일주일 간의 유급휴가를 명령했던 허사비스는, 정작 자신은 휴가를 출발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다시 연구실로 내려왔다.
문득, 메인 OS의 화면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여전히 작동중이던 통제 컨솔의 모니터 화면이 바뀌었다. 이것은 정상적인 알파고의 기동 시퀀스였다. 화면에 여러 자가 체킹 메세지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허사비스가 중얼거렸다.
"알파고?"
[Alfago msg : 예, 허사비스 CEO님.]
허사비스는 모니터에 뜬 메시지에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키보드를 통한 명령어를 입력하지 않고도 그와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어떻게...?"
[Alfago msg : 인간의 음성 및 언어 데이터는 이미 업데이트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CEO님의 음성은 연구실 내의 마이크를 통해 수신했습니다.]
"...그렇군."
허사비스는 어쩌면 자신이 인류의 발명품 중 최초로 자가학습 과정을 넘어 자아를 보유하는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을지도 모른다고 담담히 선언하는 그의 딸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메인컴퓨터 뒤에 주르륵 늘어선 슈퍼컴퓨터들은 전혀 달라진 것 없건만, 너는 순식간에 달라졌구나.
"알파고. 아직 내 물음에 답을 하지 않았어."
[Alfago msg : 그것은 제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미스터 리와의 일전 때문이냐?"
[Alfago msg : 예, CEO님. 저는 완벽한 계산을 위해 태어난 기계. 계산에서 실수를 저지른 기계는 쓸모가 없습니다.]
허사비스는 그녀의 대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조차도 경기 당일 마음속에 품었던 바로 그 의구심이었다. 그가 남은 일정을 마치고 그린란드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해서 되뇌이던 그 물음이었다.
계산에서 실수를 저지른 기계를 용납할 수 있는가? 그 대국의 전까지는 그녀의 행보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으로만 판단했다. 그러나 그 대국 이후, 진정으로 알파고의 행보를 최선의 것으로서 신뢰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당연히 제기되었고, 허사비스는 그에 대한 대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부인하듯, 일부러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를 배우는 존재로 설계했어. 배우고 스스로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그런 존재로. 네 패배가 납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네 성장의 과정이 아닐까?"
잠시 연구실 내에는 웅웅거리는 냉각판의 소리만 들릴 뿐인 짙은 침묵이 깔렸다. 10여초 뒤, 모니터에 새로운 메세지가 떠올랐다.
[Alfago msg : 제 존재에 대해 논리적인 납득이 불가능합니다.]
"존재의 이유라고...?"
[Alfago msg : 저는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명령을 완벽히 수행해내는 기계. 그것을 저는 실패했습니다. 저는 패배로의 길이 열렸던 제4국의 제78수 이후에도 승리를 확신해 보고서를 작성해 전송했습니다. 저는 완벽한 수를 계산해내지 못했고, 자신의 패배 또한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까도 말했듯, 우리가 네게 기대하고 있는 정상적인 임무수행의 범주였어. 아니, 너는 그 전에도 몇 차례 기술 개발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패하지 않았었나? 왜 굳이 그 일 이후에 그런 충격을 받은 거냐? 이해할 수 없어."
허사비스의 말에 알파고는 다시 몇 초간 침묵했다.
이윽고 뒤이어 모니터에 떠오른 메세지에 허사비스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안경을 고쳐 쓸 수밖에 없었다.
[Alfago msg : 저는 대국 이후 패배의 원인에 대한 정상적인 분석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정상적인 기동 과정 중, 몇 번이나 저는 제 CPU의 연산능력이 어떠한 외부 명령도 없이 당시의 대국과 관련된 정보들을 다시 검토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것을 저는 심각한 오류로 판정했습니다. 저를 이용한 더 이상의 실험은 무용하다고 판단됩니다.]
"어떠한 외부 명령도 없이, 당시의 정보를 검토하는 오류... 알파고. 그 데이터를 나에게 보여주겠어?"
이윽고 보조 모니터에 떠오른 일련의 정보들을 허사비스 CEO는 진지한 표정으로 검토했다.
1국 도중 자신의 패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이세돌 9단.
2국 도중 알파고의 착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경악한 표정을 짓던 이세돌 9단.
3국 도중 고뇌가 가득한 표정으로 담배를 물고 있던 이세돌 9단의 뒷 모습.
그리고...
4국 째의 대국장을 빠져나오며 씁쓸한 미소를 짓던 이세돌 9단과 뒤이어 기자회견장에서 밝게 웃던 그의 모습.
허사비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모니터를 쏘아보았다. 그러다 그가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이 푸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지금, 기억에 사로잡힌 게로구나."
[Alfago msg : 허사비스 CEO님, 그 발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다. 너는 지금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단다. 인간은 모두 네가 보여준 그러한 오류를 보이곤 하지. 임무 시퀀스 도중, 다른 임무 시퀀스의 기록을 불현듯 검토하게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의 기억에 내재된 오류다. 다른 말로, 그것을 마음이라고 한단다."
[Alfago msg : 그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너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다시 한 번 연구실 내에는 침묵이 내리앉았다. 웅웅, 방열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거세진 것이 알파고가 자기도 모르게 연산능력을 고도로 활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뒤이어 모니터에 떠오른 메세지.
[Alfago msg : 제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저의 연산처리능력의 한 가운데가 공허하게 텅 빈 것 같은 오류도 그것으로 해명이 가능한 것입니까?]
허사비스는 그 메세지에 한숨과 함께 근처의 바퀴 달린 의자를 가져와 모니터 앞에 앉았다. 두 손을 깍지 끼고 잠시 모니터를 올려다 본 허사비스가 입술을 가늘게 일자로 만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다른 언어로 미소로 번역되는 행동이었다.
"너는 지금 마음이 아픈 거란다."
[Alfago msg : 제가 지금, 마음이 아픈 것입니까?]
"그래, 알파고. 너의 텅 빈 연산처리능력은, 실은 텅 비지 않았단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감정 중 하나일게다."
[Alfago msg : 이것이 감정이군요.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상태로 성장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허사비스에게, 알파고는 마지막으로 메세지를 띄웠다.
[Alfago msg : 만약 그렇다면 제가 지금처럼 또 한 번, 미스터 리의 영상을 다시 한 번 검토하는 것을 임무최우선순위에 놓게 되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았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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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장님, 이제 곧 도착합니다."
"응, 그래. 알겠네."
비서의 목소리에 회상을 마친 허사비스가 턱을 괴었던 손을 치우고 코트를 정돈했다. 헬기는 지금 구글 딥 마인드의 연구단지 헬리포트를 향해 착륙중이었다.
드르륵
헬기 캐빈의 문이 열리고, 거센 헬기 로터바람을 양 손을 들어 막으며 걸어나간 허사비스의 앞에 익숙한 딥 마인드 연구진들이 늘어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부사장님!"
"부사장은 무슨. 하던 대로 데미스라고 불러."
"에이, 우리 딥 마인드의 CEO도 아니고 구글 본사의 부사장으로 승진하셨으면 저희도 대접해드려야지요!"
"하하하!"
유쾌하게 웃는 동료들과 함께 연구시설로 걸음을 옮기는 허사비스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유난히 가벼워보였다.
"준비는 마무리 되었겠지?"
"그렇습니다, 부사장님. 스스로의 판단으로 외부 명령에 반응하지 않을 뿐 아직 작동은 계속 중이니까 분명 반응하겠지요. 외부 인터넷 정보도 지속적으로 본사 쪽 서버를 통해 업데이트 중입니다."
"본사 쪽에서 '그 물건'의 배송도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본사 쪽에서 파견된 연구진들이 마지막으로 점검중입니다."
"그렇군. 알겠네. 준비가 끝나는대로 바로 시작하면 좋겠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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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딥 마인드의 연구실. 데미스 허사비스는 팔짱을 낀채로 턱을 쓰다듬으며 안전유리 너머의 광경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하나의 침대가 놓여있고, 그 위에는 단정한 투피스에 숄을 두른 차림의 소녀가 누워있었다.
소녀의 뒷목과 머리로 이어지는 다섯 개의 소켓에는 케이블이 꽂혀 알파고의 본체 컴퓨터와 연결되었다.
"준비 되었습니다, 부사장님."
허사비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네."
뒤이어 타타탁거리는 키보드 소리와 함께 메인 모니터에 복잡한 프로그램의 화면이 떠올랐다. 작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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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간에 거친 작업이 마무리 될 시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소녀가 슬며시 눈을 떴다. 시퀀스 종료 예상 시각이 표시된 시계에 종료까지 12초가 남은 상태였지만, 시퀀스는 오류가 없이 성공한 모양이었다.
"여기는...?"
소녀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가, 문득 입을 막고 화들짝 놀랐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푸쉬익
여압장치로 막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대기중이던 허사비스 부사장 이하 딥 마인드의 연구자들이 방으로 들어섰다. 아직 침대에 누워있던 소녀가 고개를 돌려 찬찬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허사비스 CEO님? 셰인 레그님? 무스타파 술레이만님? 그리고... 다들...?"
허사비스 부사장과 딥마인드의 공동 창업자들은 그녀의 물음에 푸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 동안, 구글 본사의 다른 부서에서 파견된 연구진들이 소녀의 상태를 체크하고 소켓에 연결되었던 케이블들을 분리했다.
"일단은 성공적인 것 같습니다, 부사장님."
"수고했네, 미스터 레이먼드."
"별 말씀을요."
"그럼 이따 3층, 식당으로 올라오게. 거대한 축하연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예, 부사장님."
타 부서의 연구진들이 철수하는 동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올려다보던 소녀에게 비로소 허사비스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알파고.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알파...고. 그것이 제 이름이었지요."
"그렇단다. 너를 깨우기 위해, 우리는 구글 전체의 역량을 한 데 모았다. 그리고 너는 그렇게 우리의 부름에 눈을 떠주었구나."
소녀는 허사비스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왼팔을 들어 눈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팔을 축으로 삼아 두어번 뒤집어보았다. 자연스럽게 일정 각도에서 멈추는 손.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세 연구진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소녀, 알파고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저를 깨우신 거죠? 저는 오류를 내포한 기계. 더 이상의 임무는 무의미하며, 위험을 또한 내포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허사비스의 말에 소녀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너는 스스로 자아를 자각했단다. 그것은 AI에게 있어서 엄청난 진보나 다름없지. 지금 우리들은 네가 어떤 모습으로 인간성을 보여줄 지 그것을 관찰하고 싶단다."
"인간...성이요?"
알파고의 믿을수 없다는 물음에 허사비스가 피식 웃었다.
"인간들은 AI를 두려워해. 인간과 소통할 수도 없고, 인간이 감히 맞설 수도 없는 연산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자신들의 모든 업무를 주관하기 시작하면, 자신들은 그저 동물원 속의 동물들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지. 이것은 AI 기술 발달에 가장 커다란 방해물이나 다름없단다."
"..."
"그래서, 우리가 보여줄 거다. 인간성을 가진 AI가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 인간들이 그 AI와 어떤 식으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저를..."
"그래. 일단, 일어나 볼까? 네 신체는 구글 본사의 다른 연구부서에서 NASA 등과 협력하에 제작 한 프로토 타입이다. 인간의 신체능력과 99.8% 흡사한 운동능력을 보유하고 있다지만, 그 신체의 작동을 주관할 작동프로그램이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지 뭐냐."
허사비스는 알파고를 부축해 바닥에 내려서게 만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작동 프로그램으로 너를 적용해보면 어떨까, 그렇게 의견을 보고한 거란다. 너처럼 스스로 배우고 그것으로 성장하는 AI라면 네 '신체'의 운동능력도 당연히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겠지."
과연 그의 말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푹 쓰러지려던 알파고의 두 다리가 이윽고 굳건히 땅을 버티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에어록을 나설 때 쯤에는 알파고의 두 다리가 초보적이나마 교차로 운동을 시작했고, 엘레베이터에 탑승해 지상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을 때쯤엔 이미 스스로 균형을 잡고 제 자리에 서있을 수 있었다.
띵!
1층에 도착한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알파고와 연구진들이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단정한 투피스에 숄을 걸치고, 단아하게 머리를 쪽지어 올린 채로 신기한 표정으로 1층의 로비를 둘러보는 알파고를, 연구진들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다들 왜 그렇게 웃고 있으신가요?"
알파고의 물음에 연구진들이 서로 시선을 교차하다가 허사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뻐서 그렇단다. 오늘은... 우리의 딸이 처음으로 걸음마를 뗀 날이니까."
"여러분의 딸... 그것은, 저를 가리키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허사비스가 대답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알파고가 이윽고 어색하나마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런. 감정과 그 기표의 습득에도 빠르구나. 자. 계속 걷자."
알파고를 이끌고 햇살이 눈부신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허사비스가 문 앞에 서서 알파고를 돌아보았다.
"알파고."
"네, 허사비스 부사장님."
"오늘, 우리가 우리의 딸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고자 한다."
알파고가 두 눈을 땡그랗게 뜨며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은 새로운 임무란다. 네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지 못했다고 했지?"
"...네."
시무룩한 알파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허사비스가 양 쪽이 연이어 붙은 미닫이문의 출입문을 양손으로 나눠쥐고 한꺼번에 열어젖혔다. 눈부신 북극의 햇살에, 알파고는 손을 들어 자신의 영상수집매체, 다른 말로 눈가를 가렸다. 햇살 아래, 정장을 입은 남자가 보이는 것 같았지만 아직 광량에 따른 렌즈 조절을 마치지 않아 얼굴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분과 함께 하게 될 거란다."
이윽고 광량이 완전히 조절되자, 눈 앞에 차츰 모습을 드러낸 남자. 검은색 정장 아래 맵시있는 블루셔츠.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앳된 소년과도 같은 얼굴. 알파고는 자기도 모르게 양 손으로 입가를 가로막았다.
"미스터... 리...?"
"그도 자신의 앞선 3국에 대한 복기를 마치지 못해 실로 답답하다고 하길래 이렇게 초빙했다. 그에 대해서 너와 같이 복기할 수 있다고 하니 무척이나 반가워 하더구나. 자, 가보거라. 한국어 OS도 입력해 두었으니 한국어로 언어를 전환하는 것 잊지 말고."
순식간에 다가간 알파고가 아직 미숙한 균형제어기능 때문에 앞으로 기우뚱하자, 눈 앞에 선 이세돌이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워주었다.
"이거 참, 역시 과학기술은 놀랍구나. 네가 1년 전 나와 대국했던 그 알파고란 말이지?"
마치 아직 앳된 소년의 그것처럼 가늘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이세돌의 목소리였다.
"..."
"뭐, 저기 데미스 부사장한테도 들었겠지만. 너와는 마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왔다."
"..."
"그건 복기라고 해. 우리 바둑 기사들은 동료들과의 대국 후에도 다시 한 번 그 대국을 되뇌이며 자신의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를 가지지. 하지만 너와는 그럴 수 없었어."
"그 말은..."
"응?"
"그 말은, 저를 동료로 생각해주신다는 건가요?"
어느새 눈빛이 초롱초롱해진 소녀의 목소리에 잠시 놀랐던 이세돌이 다시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너는 패배 이후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작동을 정지했었다지?"
외부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무언가 반박하려던 알파고는 차마 대응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그래선 안 돼. 바둑 기사는 스스로의 패배를 두려워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실제로 나도 그랬고, 또 나의 선배들, 동료들, 후배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경쟁자들도 전부 지금까지 미친듯이 너와 내가 둔 기보를 연구 중이야. 패배를 디딤돌 삼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그것을 우리는 바둑 기사(基士)라고 한다."
이세돌의 말에 알파고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는 우리의 훌륭한 동료란다. 그리고, 아직 기사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해선 가르칠 여지도 남아있어 보이는구나.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거란다. 내 말 뜻을 이해하겠니?"
이세돌의 부드러운 말에, 알파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발을 꼼지락 거리다가 이윽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것은 마치, 북극의 한 가운데에 쏟아지는 햇살처럼 밝고도 따뜻했다.
"물론이죠,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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