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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중 낙뢰를 맞은 남자, 레이 콜드웰의 이야기
이 글은 과거 다른 커뮤에서 쓴 글을 살짝 손 본 글입니다.기본적으로 야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위해 쓴 글이기도 합니다.//////야구는 정말 오랜 역사를 가진 프로 스포츠다. 1869년에 관객들에게 돈을 받고 경기를 뛴다는 '프로 야구단'이 처음 탄생했고, 척화비가 세워지던 1871년에 최초의 프로리그가 출범했다. 이렇게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다 보니 경기 중 믿기 힘든 일도 종종 일어났는데, 랜디 존슨이 던진 공에 비둘기가 날아와 맞아 죽은 사건이 그 중 하나다. 그리고 비둘기가 공에 맞기 90년 전 쯤, 여기 경기 중 번개에 맞은 선수가 있다.그의 이름은 레이 콜드웰(Ray Caldwell).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투수로, 투구 뿐만 아니라 타격에도 상당한 재능을 가진 양키스의 에이스였다. 그가 26살의 나이에 18승에 1점대 자책점을 기록했을 때, 한 저명한 기자는 그의 재능을 예찬하며 "콜드웰은 넥스트 월터 존슨이 될 것이다" 라고 얘기했다.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월터 존슨이 아니라 도밍고 헤르만이 되었다.지금도 가끔 있지만, 초창기 스포츠에서는 자기 관리가 안되고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선수가 종종 있었다. 콜드웰도 그런 부류였는데, 술 문제 때문에 항상 구단주와 감독과 마찰을 빚었고 연봉의 상당 부분이 벌금으로 나갔다. 결국 술을 마시고 숙취로 결근하는 일마저 생겼고, 그로 인해 출장 정지를 받기도 했다. 또 당시 메이저리거는 지금처럼 어마장장한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었는데, 안그래도 술을 매일같이 퍼마시는데 출장 정지로 돈까지 벌지 못하니 생활고에 빠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지를 훔친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고, 7살 난 아들의 양육비를 지급하라고 아내에게 고소를 당했다. 출장 정지기간동안 파나마에서 야구를 했다는 썰도 있다.반성하고 성실하게 야구를 하는가 싶다가도, 다시 술을 마시고 이탈하는 일이 반복되자 기어코 감독은 사설탐정을 고용해서 콜드웰을 감시하기까지 했다. 그렇다. 사설탐정 고용해서 선수 뒷조사하는 양키스의 전통은 스타인브레너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그러다가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입대를 피할 목적으로 조선회사에 입사했는데, 이 일로 구단주의 분노를 사 9년간 몸담았던 양키스에서 쫓겨나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되었고, 보스턴에서도 얼마 안가 방출 당하고 만다.강속구를 뽐내던 차세대 월터 존슨은 어디가고, 이제는 무릎 부상으로 신음하는 31살의 노장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대로 은퇴하나 싶었지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그에게 손을 내미면서 은퇴는 미뤄지게 된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시즌 도중에 감독을 교체하면서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계약서가 상당히 골때린다.콜드웰: 저 감독님... 계약서에 오타가 있는데요? 계약 조항이 "경기가 끝나고 술을 마시지 말 것" 인데 not이 빠져서 "술을 마실것" 으로 되어 있어요.트리스 스피커(감독): 아냐, 오타 없어. 술을 마실것이 맞아.콜드웰: 네? 술을 마시라고요?스피커: 술은 죽어야 끊는거야. 어차피 술 못 끊을거면 차라리 경기 끝나고 마시고, 다음날 자고, 그 다음날 훈련해. 그게 차라리 나아.스피커: 홀리이 기괴한 계약 조항과 함께 인디언스에 입단한 콜드웰은, 자신을 인정하고 배려해준 스피커에 대한 감사 때문일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압박감 때문이었을까.그는 클리블랜드에서의 첫 경기에서 의문의 회춘과 함께 자신의 인생투를 보여준다.1919년 8월 24일, 필라델피아 원정에 선발투수로 등판한 그는 9회 2사까지 1실점으로 막으면서 팀의 2대 1 리드를 지켜낸다. 자신의 데뷔전을 완투승으로 장식하기 위해 그는 마지막 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발판을 닦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르르 쾅!순간 세상이 새하얘지고, 우레가 경기장을 뒤덮으면서 낙뢰가 콜드웰을 강타했다. 증언에 따르면, 기자석에 있는 기자들까지 충격파를 느꼈고, 유격수 레이 채프먼은 콜드웰의 상태를 확인하려 뛰어가다가 다리에 찌릿함을 느끼고 주저 앉았을 뻔 했다고 한다.당시 콜드웰은 의식을 잃은 채 양팔을 벌리고 누워있었다고 한다. 가슴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모두가 콜드웰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경기장에 의사도 없었고 심폐소생술도 없을 때라, 소생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그 순간.콜드웰: 윽... 으윽...콜드웰이 신음소리를 내며 힘겹게 일어나기 시작했다.스피커(감독겸 중견수): 이봐 콜드웰, 괜찮나? 날 알아 보겠어?콜드웰: 네... 감독님... 스피커: 그래 죽지 않아서 다행이구만. 일단 병원부터 가세. 콜드웰: 네?? 아뇨. 이 게임은 제가 끝낼겁니다. 이건 제 승리에요. 누구한테도 넘겨줄 수 없어요.스피커: 바보같은 사람아! 자네 번개를 맞았다고 번개를! 무슨 위험한 상태일지도 몰라. 빨리 병원부터 가세.콜드웰: 감독님... 감독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MVP? 타이 콥을 누르고 타격왕을 따낼 때? 우승할 때?전... 지금입니다..!레이 채프먼(유격수): 낙뢰로 유격수인 나까지 쓰러질 뻔 했는데... 콜드웰 자네 단단히 미쳤군....감독은 그를 교체하고 병원에 보내려 했으나, 본인이 워낙 완강하게 교체를 거부하기에 어쩔수 없이 경기를 속행했고, 콜드웰은 마지막 타자를 아웃으로 잡아내고 완투승을 거둔다.번개 때문일까? 그의 집념 때문일까? 그는 그 해 클리블랜드에서 6경기 동안 5승 1패를 기록한다. 그 사이 쌓은 bwar은 무려 1.7이며, 5승 중에는 자신을 버린 양키스를 상대로 거둔 노히트 노런도 있었다. 그가 벼락에 맞고 불과 17일 이후의 일이었다.아마 눈썰미 좋은 클리블랜드 팬이라면, 이 글을 읽으면서 이미 이 글의 결말을 짐작했을 것이다.1919년 클리블랜드는 스피커의 지휘와 콜드웰의 벼락투혼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우승에 도전했지만, 아쉽게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게 밀려 리그 2위에 그치고 만다. 다음해인 1920년, 클리블랜드는 절치부심해서 다시 한번 우승을 노린다. 콜드웰은 팀을 무단 이탈하는 일 없이 3선발로서 팀을 지탱하며, 생에 최초로 20승을 거둔다.이 과정에서 팀의 유격수 레이 채프먼이 공을 머리에 맞고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1920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두고 채프먼의 영전에 바치는데, 이는 클리블랜드 최초의 우승이다.콜드웰은 1921년까지 뛰고 더는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못한다. 대신 그는 끝까지 야구를 포기하지 않고 12년간 마이너리그에서 뛰다가 은퇴한다. 젊은시절에는 팀을 무단이탈하며 물의를 일으켰지만, 마이너리그에서 12년간 뛰었던걸 보면 야구에 대한 열정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야구기자 월터 트럼블은 콜드웰이 젊은 시절 이러한 평가를 남겼다. "콜드웰은 야구를 정말 좋아하는 소년입니다. 그가 제 컨디션일 때, 그는 리그 최고의 투수로 군림합니다............타이 콥(Ty Cobb)과 존 맥그로(John Mcgrow) 같은 선수들은 절대 패배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동전 던지기에도 온 신경을 쏟습니다. 만약 콜드웰이 그들과 같은 불꽃을 가지고 더 큰 야망을 품는다면, 그는 야구사에 길이남을 선수가 될 것입니다."비록 그의 커리어는 월터 트럼블의 기대보다는 덜 훌륭하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만은 진심이었던것 같다. 현재까지 클리블랜드의 우승은 두번밖에 없다.레이 채프먼이 사망하고, 중견수 트리스 스피커와 함께 우승을 거머쥐었던 1920년의 우승.흑인인 래리 도비와 사첼 페이지를 영입하면서, mvp 유격수 겸 감독인 루 보드로의 지휘 아래에 우승을 거머쥔 1948년.현재 가디언스의 기둥은 3루수 호세 라미레즈다.라미레즈 또한 보드로와 스피커와 같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하지만 라미레즈가 선대의 두 위대한 캡틴처럼, 클리블랜드에 우승컵을 가져오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리라 믿는다.클리블랜드는 스피커의 전설, 콜드웰의 투혼, 부드로의 지휘, 도비의 투쟁이 깃든 신성한 mlb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냉전) 미그23 vs 미라주F1 붙은 썰
1975년부터 있었던 앙골라 내전에서의 남아공 공군 vs 쿠바 공군 간 공중전 기록은 해외 밀덕들에게는 꽤나 신선한 떡밥으로 여겨지는 듯 한데, 흔한 냉전기 서방 전투기 vs 공산권 전투기의 대결구도나 전투경과를 보면 대체로 공산권이 밀리고, 그 이유가 베트남전, 걸프전같이 애초에 체급부터가 게임이 안되는-서방측이 일방적으로 팬 사례가 대다수거나, 그나마 비빌만했던 중동전쟁이나 레바논 전쟁에서의 이스라엘vs아랍 구도도 이스라엘의 높은 작전 능력덕에 공산권 기체가 갈려나가는 모습밖엔 없었고 사실 냉전이 아니더라도 2차대전 이후 인류 공중전 역사를 보면 그냥 더 우수한 기체와 미사일, 레이더를 가질 수 있는 경제적/정치적 우위에 있는 나라가 개발도상국이나 반군을 쥐어패는게 흔히 그려지는 구도인데 반해 앙골라 내전에서의 사례는 오히려 서방제(프랑스제) 전투기가 공산권(소련제) 전투기에게 우위를 잃어 소극적 작전으로 들어가고, (물론 남아공은 '서방 진영'으로 분류할 순 없고 제 3의 세력에 더 가깝지만...프랑스도 주로 미국과 동맹을 맺을 수 있는 확고한 서방이 아닌 애매한 스탠스의 나라들한테 무기파는 나라고) 그게 딱히 소련-아프가니스탄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처럼 공산/구공산 권이 압도적인 국력을 가진 사례도 아니고 비슷비슷한 체급, 오히려 경제적으로는 더 밀리는 나라(쿠바)가 더 앞서있는 나라(남아공) 공군을 상대로 판정승했으며, 그 전투 경과도 기술력이 어느 한쪽이 압도적이었다기보단 여러가지 요소가 개입한 느낌이 강하기 때문. 물론 후술하겠지만 레이더 성능과 미사일 모두 결론적으로 쿠바가 우위였고, 나무위키에선 그냥 서방 제제로 남아공이 최신 미사일을 못사서 쿠바가 우세했다, 정도로 써있기도 하지만 이것도 아주 압도적 우위는 아니었으며 쿠바 공군이 남아공 공군을 제압하는 과정을 자세히 보면 단순 기술 우세뿐만 아니라 작전 계획 차이 등 지휘관과 파일럿의 측면도 적지 않게 개입했고, 대체로 남아공 파일럿이 신생국 쿠바 파일럿에 비해 더 우수한 여건에서 오래 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파일럿 훈련 경험, 공군을 길러내기 위한 국가의 전체적인 경제 사회적 인프라는 오히려 남아공이 앞서 있었기에, 이 사례에 관심을 가지는 냉전 좋아하는 영어웹 양덕들도 많은 듯함. 1975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이 철수함에 따라 독립한 앙골라는 곧 자유 vs 공산 진영간 내전, 거기에 숟가락을 얹기 바빴던 여러 나라들에 의해 개판이 되었고, 여기에 신생 공산 국가였던 쿠바가 개입해 공군과 육군, 방공군 병력들을 보냈다는 건 나름 유명함. 국내에선 쿠바의 아프리카 개입에 대해 찾아보면 일단 나오는 것 자체도 그렇게 많지 않지만 대개 자국군을 용병으로 아프리카에 보냈다, 쿠바가 미국에 의한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이런 류의 글이 많은 듯함. 근데 정작 넬슨 만델라는 연설에서 쿠바의 아프리카 개입에 대해 쿠바인들이 '원칙적이고 사심없는 성격으로 아프리카인을 도우려 했다'고 연설하기도 했음. 해외에서도 논쟁이 많고 국내는 아무래도 반공주의가 주류다보니 부정적인 시선이 많지만 한편으론 이게 아프리카에 그냥 공산블럭을 퍼트리려는 시도냐, 자국민을 용병으로 보낸거냐, 순수하게 아프리카인들을 도와 남아공 백인 정권과 자본주의 진영에 맞선거냐 평가가 갈림. 이건 떡밥 잘못 던졌다간 군갤 폭파되고도 남을 수준이라 그냥 대충 넘어가서, 군붕이는 군붕이답게 정치에 관심을 끈채 그래서 콩산당이고 나발이고 나발이고 탱크랑 전투기가 어떻게 싸웠는데 로 오늘의 포커스를 잡으려 함. 대충 1975년 앙골라 독립 하자마자 내전, 쿠바군 개입, 국제 결의로 1991년까지 쿠바군 철수하기로 계획해 실제로 이행되었고, 근데 그 와중 숟가락 얹으려는 남아공 백인우월주의 정권이 앙골라에 개입하며 남아공vs쿠바간 공중전이 벌어졌다, 정도만 짚고 넘어가자. 남아공군과 쿠바군이 남의 땅에서 싸움 벌인건 쿠바군의 1차 개입(대략 1975년~1979년)과 2차 개입(대략 1983년~1988년)중 2차 개입, 특히 앙골라 내전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였던 쿠이토 쿠이나발레 전투가 벌어진 1987년에 가장 많은 공중전이 벌어졌는데, 당시 남아공 공군은 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한 국제사회의 제재로 프랑스로부터 제한적으로 기체를 수입하거나 라이선스 생산하다 그것도 끊긴 상황이었고, 쿠바 공군은 신생 국가였고 소련의 영향으로 소련 공군 휘하에서 급하게 훈련된 상황이었음. 그리고 양쪽은 어떻게 그 국제제재를 뚫고 수입한 프랑스제 미라주F1vs소련에게서 지원받은 수출형 미그23으로 공군을 구성하고 있었음. 남아공군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근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확고한 공중전 우위를 가지고 있었음. 남아공이 국제사회에 백인 용병으로 자국군을 위장시켜 (이 위장이 무려 3년간 먹혀들어서 서방 매체에선 70년대까지 남아공이 개입한줄도 몰랐을 정도) 처음 개입했을 때, 앙골라 공산정권의 Mig-21을 미라주F1이 격추한 적도 있었을 정도. 70년대 미라주F1은 매우 초기형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이자 후방에서만 락온이 가능했으며 기동력도 뒤쳐졌던 사이드와인더B로 무장했고, 앙골라의 Mig-21들은 그보다 진보된 R-60미사일로 무장했으나, 파일럿 실력이나 이를 받쳐주기 위한 여러 인프라 여건이 남아공이 압도적이다 보니 남아공 공군은 앙골라 공산정권 공군 등을 상대로 언제나 우위를 점했음. (사실 R-60이나 사이드와인더B나 후방에서만 락온 가능한 단거리 미사일이란건 같지만, R-60쪽이 기동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함) 그러나 국제사회의 제재로 남아공 공군은 무장 수입길이 막혔고 이로 인해 공대공 무장을 진보시키는데 애로사항을 먹었음. 이 때문에 80년대 시점에서 기체는 여전히 미라주F1을 쓰고 있었고, 물론 기동력이 훨신 우수한 프랑스제 R.550 매직 1 단거리미사일, 반능동 레이더 미사일 R.530 등으로 무장이 진일보하긴 했지만 끝까지 더 기동력이 우수한 기체나 전방위 락온 가능한 단거리 마시일을 도입하지는 못했음. 남아공 공군은 뭐 그래도 이정도면 아프리카 공군 정도는 무리없이 제압하겠지...란 생각을 했지만 그때 나타난게 바로 소련제 Mig-23을 끌고 나타난 쿠바 공군. (짤 출처: Binkov's Battlegrounds 유튜브 채널) 우선 레이더의 측면에서, 미라주F1의 구식 시라노 4 레이더는 Mig-23의 사피르 레이더에 비해 최대 사거리는 110km vs 65km로 앞서있었지만, 이 당시 레이더의 최대 사거리는 실제 운용 가능한 반능동 레이더 미사일의 현실적 명중 가능 사거리와 심한 괴리감이 있었음. 특히 프랑스제 R.530 미사일의 경우, 60년대 미제 스패로우 미사일이랑 경합하던 물건이었는데 이스라엘 공군이 먼저 써보고 버린 후 스패로우로 갈아탔을 정도로 안정적인 유도 성능이 떨어졌음. 그 대가로 종말 유도 성능이나 기동성이 앞섰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신뢰성 문제 등으로 이미 이스라엘 공군은 프랑스제 반능동 레이더 미사일을 모두 손절했을 정도로 실전에서의 유효성이 떨어졌다는게 입증된 물건이었고, 미국에서 무기를 수입할 길이 없던 남아공 공군이나 선택한 미사일이었음. 반면 쿠바 Mig-23의 레이더는 최대 사거리가 떨어졌을 뿐 레이더의 락온 능력은 훨신 앞서있었고, 무엇보다 룩다운 기능이 있어 저고도에서 혹은 고도차이가 많이 날 경우 락온을 못하는 구식 레이더에 비해 저고도의/고도차이가 나는 물체도 락온할 수 있었으며, 다른거 다 제치고 소련제 R-23 중거리 미사일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 R-23과 사피르 레이더는 미제 스패로우 미사일/도플러 룩다운 기능이 있는 레이더 조합과 비교할 때, 사거리나 명중률은 떨어지지만 잠깐 레이더 유도가 끊겨도 다시 락온을 잡으면 미사일이 표적을 회복하는 기능이 있었음. 미제 최신형 스패로우F와 비교해도 이랬는데 60년대 프랑스의 R.530과 비교하면 소련제 R-23은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 여기까지 들으면 '아 쿠바 공군이 중거리 레이더 유도 미사일빨로 이겼겠구나' 생각하겠지만... 사실 쿠바 공군도 남아공 공군도 전쟁 내내 별다른 중장거리 레이더 미사일 교전을 하지 않았음. 때문에 위에서 설명한 레이더나 중거리 마시일 유도능력 차이는 그냥 그런게 있었구나...정도로 생각하면 됨. 남아공은 프랑스로부터도 손절당한 뒤 수입이 끊긴 귀중한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인 R.530을 앙골라 전선에서 써먹으려 하지 않았고, 애초에 써먹었어도 쿠바 공군의 R-23에 상대는 안되었을 것임. 쿠바 공군은 쿠바 공군대로, 후술하겠지만 남아공 공군의 전술이 초반 교전 이후 저고도 기습 침투, 저공에서 급상승해 기습으로 전술을 세웠기 때문에 쓸 일이 별로 없었음.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레이더와 중거리 레이더 유도 미사일은 큰 비중이 없음. 가장 큰 차이이자 결정적인 승부를 가른건 단거리 열추적 미사일 쪽으로, 남아공 공군이 끝까지 전방위 락온이 가능한 매직2 미사일을 도입하지 못하고 매직1에 머무른 반면, 쿠바 공군은 소련제 R-60MK, 즉 후방이 아닌 전면에서도 락온이 가능한 전방위 미사일을 도입한 것이었음. 앞에서 별 의미도 없는 중거리 미사일 전력과 레이더 전력의 차이에 대해 열심히 떠들었는데,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아공 공군은 이상하리만치 자신만만한 상황이었음. 남아공 공군은 아프리카 공군에 비해 조종사의 숙련도가 높았고, 여러번의 중앙아프리카 개입에서의 그 전과로 파일럿 양성 체계와 작전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음. 남아공 공군은 비록 쿠바 공군이 미사일과 레이더 기체 성능 면에서 앞서있지만, 자신들은 작전 능력과 파일럿 숙련도에서 앞서있고, 그래서 초반 교전에서 기술적 단점을 뛰어넘는 작전적 우위를 점해 미숙한 쿠바 공군의 최신 기체들을 격추시켜버리면, 그 우위를 이후로도 가져갈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그 작전적 우위란게 뭐냐면 바로 저고도에서 비행하며 쿠바 공군의 레이더와 중거리 미사일로부터 숨다가, 기습적으로 급상승해 프랑스 기체 특유의 뛰어난 기동력, 도그파이팅으로 Mig-23들을 작살내자는 것이었음. 이러면 에너지파이팅등 여러 면에서 불리한 것들을 앉고 가지만, 그걸 상쇄할 정도로 본인들의 파일럿 숙련도와 작전능력이 뛰어나다고 본 것임. 그래서 벌어진게 남아공 공군과 쿠바 공군의 본격적인 첫 충돌인 1987년 9월 27일 교전이었음. 이 교전은 공격헬기를 호위하던 쿠바 공군의 Mig-23 편대를, 남아공의 미라주F1 편대가 기습하면서 벌어졌음. 미라주F1 파일럿들은 저고도에서 지상관제에 의존하며 Mig-23을 따라가다, Mig-23이 눈치챌 즈음 급상승해 도그파이팅을 벌이거나 끝까지 눈치를 못챈다면 후방에서만 락온할 수 있지만 기동력이 매우 우수한 매직1 미사일로 일방적으로 학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지상 레이더의 발견인지, 아니면 Mig-23 파일럿들이 남아공인들 생각만큼 미숙하지 않아 눈치를 챘는지는 모르지만 Mig-23 파일럿들은 미라주F1 파일럿들의 예상보다 훨신 먼저 그들의 추격, 그리고 그들이 남아공 기체라는 것까지 식별하고 기체를 돌려 근접전에 돌입했음. 하지만 그럼에도 남아공 공군의 생각대로 쿠바 파일럿들이 미숙하고, 기체의 열세를 매울 만큼 남아공 파일럿들이 우수한 실력을 갖추었다면 도그파이팅으로 Mig-23을 이긴다는 옵션도 있었을 것임. 그러나 Mig-23이 발사한, 전방위 락온이 가능한 R-60MK 미사일에 미라주F1 편대는 우왕좌왕하며 그걸 피하기 위해 순식간에 흩어져버렸고, 도그파이팅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예상과는 달리 근거리 공중전에서도 참패, 미라주기들은 열심히 아군 방공망 쪽으로 빤스런치지만 결국 한대가 R60MK에 피격되어 격추당하고, 한대가 꼬리날개 손상을 입고 착륙하지만 곧바로 착륙충돌로 파일럿이 튕겨져나가 기체와 파일럿 모두 회복불능이 되는 피해를 입으며 9월 27일 교전은 쿠바 공군의 승리로 끝났음. 비록 기체와 파일럿 손실은 2대/2명에 불과했지만 이 초반교전으로 남아공 공군은 모든 자신감을 상실하고 다시 쿠바로부터 제공권을 가져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모든 기체의 작전을 야간공습, 저공침투로 바꿔버렸음. 간단히 말해 만약 낮에/고공에서 미라주F1과 미그23이 또 떠서 공중전을 벌인다면, 높은 확률로 다시 털릴 거고, 그럼 아프리카에서 공중전 만큼은 남아공이 먹고 들어간다는 국민적 자부심도 추락할게 뻔하니 야간에 기습적으로 쿠바 비행장을 급습하거나, 저공침투로 쿠바 공군 시설을 공격하는게 더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임. 그러나 이러한 작전기조 변경은 낮에, 고공에서의 제공권을 완전히 쿠바군에 넘겨버렸고, 쿠바군은 공격헬기와 소수의 Mig-23BN(지상공격형) 폭격기로 신나게 남아공군을 공습해댄데다가 저공침투나 야간 작전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음. 애시당초 공산권 국가 특) 공군력 딸려서 지상방공망에 신경 많이씀 이었는데 이런 작전기조가 성공할 리도 없었고, 결국 수 많은 미라주F1이 무리하게 쿠바군 비행장을 공격하려다 지대공 미사일/대공포/Mig-23의 요격에 격추당했음. 물론 쿠바군 역시 앙골라 개입에서 9기의 Mig-23을(지상공격형 BN 포함) 지대공미사일 등에 잃었다지만 남아공군은 아예 9월 27일 공중전 이후로는 적극적인 작전 자체를 접고 제공권을 넘겨줬으며, 사료마다 달라 정확하진 않지만 최소 수십대가 넘는 미라주F1을 잃고 이후 간신히 스웨덴제 그리펜을 수입해서 공군력을 매웠다는 것을 보면 앙골라 내전에서의 쿠바 공군 vs 남아공 공군 사례는 냉전기에 (약간 애매하지만)기술적으로 타 사례에 비해 비교적 대등한 두 세력간 공중전, 그 공중전에서 서방제 기체와 미사일로 무장한 공군이 패배한 사례로 앞으로도 계속 남을 것임. (물론 다시 리바이벌하지만 남아공은 딱히 서방 진영으로 확실히 분류할 순 없음. 프랑스제 무기도 그렇고) 출처: Leopold Scholts,2008 등외
작성자 : 나쿠로이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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