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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Jap... 현직 교사가 말아주는 로맨스 스캠
도덕성이란 찾아볼수없는 민족 Jap... 오늘은 데이팅 어플로 700 만엔을 뜯어낸 스시녀가 화제다. 체포된 여성은 오히라 나루미(30세) 현직 고등학교 교사 나루미는 50대 남성으로부터 약 700 만엔을 갈취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녀는 피해자가 700 만엔이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으므로 갚지않았다고 주장하고있는데 약 3년전, 피해자와 데이팅어플로 만난 두 사람은 같이 식사를 하는 등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올해 3월 나루미는 피해자와 호텔로비에서 만나 위조된 서류를 보여주며 민사 재판 패소로 인해 700만엔이 필요하다고 말해 피해자로부터 700만엔을 "빌렸다" 남성은 이에 속아 700만엔을 빌려줬지만 당연히 이는 거짓말이였고 ㅋㅋ 그래서 나루미는 돈을 호의로 받은것이기 때문에 갈취했다라는 혐의에는 부인하고있는것이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나루미는 왜 700 만엔이라는 돈이 필요했을까? 경시청은 나루미가 피해자인 "50대 남성" 말고도 또 다른 남성들과도 교제 중이였고 그들과의 트러블 해결에 돈이 필요했을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ㅅㅂ 근데 30대 저 얼굴로 문어발연애를 하네 노인틀딱들만 상대해서 그런가, 비위도 좋다 Jap! 일본인들도 마찬가지로 느끼는지 30살 얼굴임을 믿지못하는 모습 모든 스시녀의 받아먹는 리리짱화... 일본인의 안락사 이 외에도 스캠 스시녀의 외모에 대한 훌륭한 일본인들의 품평이 계속되고있다고한다. 평소 스시녀를 하늘로 모시던 무료변호사분들의 변론을 기대해보자 일뽕은 정신병, 일뽕은 저능아
작성자 : 개똥본고정닉
저는 오늘 지구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입니다
출처 : https://infieldreport.com/?p=1368 저는 오늘 지구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입니다 - Infield Report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사람이 떠나도 영원히 잊히지 않는 상징이 있다. 스포츠에서 대표적인 상징이라면 유니폼, 그리고 그 뒤에 적힌 ‘등번호’다. 은퇴한 선수를 기리기 위해 해당 등번호를 영원히 다른 선수에게 부여하지 않는 것. 즉, 영구결번은 1935년 NFL의 레이 플레허티를 시작으로 어느덧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유구한 영구결번의 역사에 이름을 […]infieldreport.com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사람이 떠나도 영원히 잊히지 않는 상징이 있다. 스포츠에서 대표적인 상징이라면 유니폼, 그리고 그 뒤에 적힌 ‘등번호’다. 은퇴한 선수를 기리기 위해 해당 등번호를 영원히 다른 선수에게 부여하지 않는 것. 즉, 영구결번은 1935년 NFL의 레이 플레허티를 시작으로 어느덧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유구한 영구결번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첫 야구 선수는 누구일까.메이저리그 최초의 영구결번이자 영원한 뉴욕 양키스의 NO. 4 ‘철마’ 루 게릭의 이야기를 시작한다.컬럼비아 대학교 시절 게릭, 의외로 그는 타격보다는 투수로 주목도가 높았던 유망주였다독일인 이민자의 아들, 양키스의 1루수가 되다1903년 6월 19일, 독일계 이민자인 아버지 하인리히 게릭과 어머니 크리스티나 게릭의 아들로 태어난 하인리히 루트비히 게릭은 가난한 집안 사정에도 불구 뛰어난 학업과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한 모범생이었다. 공학 전공생이었던 게릭은 미식축 구 장학생이었으나 야구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대표적으로 1923년 4월 18일 윌리엄스 대학을 상대로 투수로 등판해 17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던 것. 뿐만 아니라, 좌타 거포로서 엄청난 비거리의 홈런을 몰아치던 그의 재능에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터였던 폴 크리첼은 즉시 영입을 추천했다. 그렇게 게릭은 동월 30일 뉴욕 양키스와 입단 계약에 합의,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다.지금은 전설로 추앙받는 게릭이지만, 그 역시 루키 시절은 어려움으로 가득했다. 입단 전부터 90승 이상을 기록하며 월드 시리즈를 노크하던 양키스 전력에는 큰 틈이 없었고, 따라서 첫 2년은 단 23경기 출전에 그쳐야 했다. 하지만 1925년 주전 1루수였던 윌리 핍이 부상으로 이탈하자 본격적으로 주전 라인업에 합류. 곧바로 500타석 가까이 출전하며 20개의 홈런을 기록해 주전 자리를 꿰차게 된다. 그렇게 게릭의 전성기가 시작됐다.1926년 데뷔 첫 100타점 시즌을 보낸 게릭에게 슬럼프란 없었다. 이듬해인 1927년 타율 0.373, OPS 1.240, 47홈런 173타점을 기록하며 리그 MVP를 수상한 것. 당시 베이브 루스의 171타점을 넘긴 타점 신기록이자 현재까지도 손꼽히는 청정 타자의 단일 시즌 기록 중 하나다. 더불어 60홈런을 때려내며 홈런의 신기원을 열어낸 루스,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토니 라제리, 얼 콤스와 살인 타선을 구축해 커리어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다.당대를 지배한 레전드이자 사상 최고의 듀오인 루 게릭-베이스 루스, 두 선수가 양키스에서 기록한 홈런 수만 1,152개다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양키스의 철마,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를 맞이하다리그 최정상급 타자가 된 게릭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팀의 4번 타자로서 달게 된 4번의 등번호는 같은 이유로 3번을 달았던 루스와 함께 상대 팀 투수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으며 압도적인 홈런-타점 행진을 이어갔다. 1931년 아메리칸 리그 타점 신기록인 185타점과 한 경기 4홈런, 1934년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비롯한 타격 5관왕 달성 등 엄청난 기록을 쏟아내며 팀의 우승과 본인의 명성을 쌓아갔다. 그리고 1936년 홈런-출루-장타 3관왕으로 두 번째 시즌 MVP 수상까지. 루스가 양키스를 떠난 후에도 위기 없이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타격에서 여러 수상 실적을 쌓아 올린 게릭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기록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2,130경기 연속 출장이었다. 1925년 6월 1일 대타 출장으로 시작된 그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은 첫 MVP 시즌을 지나 30년대에도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타격 성적만큼이나 빛났던 게릭의 투철한 프로 정신, 2,130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만들어내다1933년 투구에 맞아 쓰러지거나 1934년 심각한 허리 통증으로 첫 타석 소화 후 곧바로 교체되는 등 기록 달성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으나 게릭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훗날 그의 X-레이 사진에서 열 손가락 모두 골절 후 스스로 아문 흔적이 있을 정도였으나, 그의 출장은 계속됐고 무려 만 13년의 세월 동안 전 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게릭의 열정에 사람들은 그를 철마(The Iron Horse)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리고 특유의 부드러운 성격과 투철한 프로 정신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렇듯 13시즌 동안 리그를 지배했던 선수에게 에이징 커브는 너무나 급작스럽고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다. ‘루게릭병’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질병, 근위축성측삭경화증이었다.불길한 징조의 시작은 1938년이었다. 누구보다 몸 상태를 중요시하던 게릭이 유난히 원인 모를 피로감을 자주 호소했으며 OPS 1.100을 가볍게 넘기던 지난해와 달리 OPS가 0.932로 급락한 것이다. 피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으며 이듬해 들어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시범경기에서 단 하나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했음은 물론 시즌 개막 후 단 하나의 장타도 때려내지 못하는 최악의 부진에 빠진 것. 주루 도중 쓰러질 정도로 게릭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으며 수비 역시 정상적인 소화가 불가능해졌다.1920-30년대 양키스의 7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끈 조 맥카시 감독, 게릭과의 화목한 한 컷그러던 4월 30일 1루 수비 중 자신에게 오는 평범한 땅볼 타구를 겨우겨우 처리한 게릭, 공수교대로 더그아웃에 들어가는데 팀 동료에게 “나이스 커버”라는 격려를 듣게 된다. 간단히 수비조차 동료들에게는 위태롭게 보여진 것. 큰 충격을 받은 게릭은 다음 경기 전 조 맥카시 감독을 찾아가 본인이 팀 전력에 방해가 된다는 말을 덧붙이며 연속 경기 출장을 멈춰달라고 건의했고 그렇게 게릭의 연속 출장은 2,130경기에서 멈추게 된다. 그리고 1939년 4월 30일의 경기는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게릭의 컨디션은 하루 이틀의 휴식으로 나아질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동년 6월 그는 부인의 권유로 6일간 정밀 검사를 받았고, 자신의 36번째 생일인 6월 19일 근위축성측삭경화증 진단을 받게 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팬들을 만났음에도, 운동 신경의 문제로 근육이 퇴화하는 병세로 인해 이미 게릭은 누군가의 부축이 아니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곧바로 그의 불치병이 세상에 공개되었고 이틀 뒤 양키스는 게릭의 은퇴를 발표했다. 통산 타율 0.340, OPS 1.080, 2721안타, 그리고 500홈런-2000타점에 단 7홈런-5타점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최초의 영구결번, 양키스의 영원한 4번으로 남다언론과 팬들은 게릭을 그냥 떠나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에 대한 감사와 영광을 기념하고자 양키스는 7월 4일 ‘루 게릭 감사일’을 가졌다. 당시 뉴욕시장이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 팀 동료였던 베이브 루스를 비롯해 만원 관중이 양키 스타디움을 찾았으며 라과디아 시장은 그에게 ‘훌륭한 스포츠맨과 시민의 전형’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조 맥카시 감독은 연속 경기 출장이 멈춘 그 날을 떠올리면서 게릭에게 “너는 결코 팀에게 방해가 된 적이 없었다.”며 눈물로 작별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남긴 게릭의 답변은 영원히 야구사에 남게 됐다.팬 여러분, 지난 2주 동안 제게 찾아온 불행에 대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 저는 제 자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7년 동안 야구장에 있으며 여러분들로부터 호의와 격려만을 받아 왔습니다.(중략)그리고 당신이 배울 수 있도록, 또 커갈 수 있도록 본인의 삶을 쏟아 일하시는 부모님이 계신다는 건 축복 받은 일입니다. 당신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당신이 생각한 그 이상으로 큰 용기를 보여주는 아내가 있다면 그건 제가 아는 가장 멋진 일입니다.이러한 시련을 겪게 됐을지라도, 전 이렇듯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누려왔다는 말씀을 전하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관중들의 수많은 박수갈채을 받으며 게릭은 눈물을 흘렸고 루스는 그에게 다가와 진한 포옹을 했다. 그리고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그의 등번호 4번을 다른 선수에게 부여하지 않기로 선언했다. 야구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이었다. 그렇게 루 게릭은 뉴욕 양키스 역사의 영원한 NO. 4로 남게됐다.이제는 뜻 깊은 하루로 영원히 기억될 레전드의 명성은퇴 후 그의 여생은 길지 않았다. 동년 12월, 은퇴 후 5년이라는 유예 기간 없이 곧바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게릭은 사상 최연소 명예의 전당 헌액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라과디아 시장의 권유로 가석방 위원직을 맡아 1년간 활동했으나 1941년 들어 그의 몸 상태는 사무직도 맡지 못할 정도로 악화하여 5월에 사임하였다. 그리고 1941년 6월 2일 22시 10분 게릭은 향년 만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전국의 메이저리그 구장에는 조기가 게양됐으며 이듬해 그의 일생을 담은 전기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다. 사후에도 루게릭병이라는 별칭으로 꾸준히 언급된 레전드는 80년 뒤인 2021년 MLB 사무국이 그가 세상을 떠난 6월 2일을 루 게릭 데이로 지정하며 다시금 주목받았다.루 게릭의 은퇴와 함께 야구는 영구결번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전설을 기리고 존경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역사의 첫 페이지에 이름을 남긴 루 게릭은 이제 단순한 선수가 아니다. 역경 앞에서도 감사와 겸손을 잃지 않았던 진정한 스포츠맨의 상징으로, 그리고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입니다”라는 마지막 고백과 함께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양키스의 NO. 4로 살아 있다.출처 : https://infieldreport.com/?p=1368 저는 오늘 지구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입니다 - Infield Report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사람이 떠나도 영원히 잊히지 않는 상징이 있다. 스포츠에서 대표적인 상징이라면 유니폼, 그리고 그 뒤에 적힌 ‘등번호’다. 은퇴한 선수를 기리기 위해 해당 등번호를 영원히 다른 선수에게 부여하지 않는 것. 즉, 영구결번은 1935년 NFL의 레이 플레허티를 시작으로 어느덧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유구한 영구결번의 역사에 이름을 […]infieldreport.com
작성자 : InfieldReport고정닉
스압)싱글벙글 실패한 소형차의 이야기
[시리즈] 싱글벙글 클래식카 이야기 · 스압) 싱글벙글 열정의 50년대 미국차들 · 초스압)싱글벙글 현존하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브랜드 · 스압) 싱글벙글 열정의 50년대 미국차들 2편 · 스압)싱글벙글 낭만의 60년대 미국차들 https://youtu.be/NtIlG87_D28?si=GnDNW8_cAey1owmh The StrokeProvided to YouTube by Universal Music GroupThe Stroke · Billy SquierAbsolute Hits℗ 2002 Capitol Records, LLCReleased on: 2005-03-29Producer: Mack SquierProd...youtu.be (보면서 들으면 좋은 노래) ● 크라이슬러 그룹(현 스텔란티스) 사옥 바야흐로 냉전이 무르익고 중동에서 전운이 감돌던 1971년, 미국의 자동차 빅3 중 하나인 크라이슬러 그룹에서는 점차 변화하는 트랜드에 맞춰 소형차를 북미 시장에 출시할 생각을 품게 된다. 이는 빅3 중 가장 체급이 작았던 크라이슬러 그룹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특히 공격적으로 진출하던 외국계 브랜드들의 확장이 큰 영향을 끼쳤다. 아 씹.. 상도덕도 없는 쪽바리들이랑 크라우츠 놈들이 자꾸 우리 파이를 뺏어가네.. 이대로면 우리만 뒤쳐지겠는데? 크라이슬러의 이와 같은 위기감은 단순한 피해망상이 아니었는데, 1960년대부터 미국 시장에 진출해 큰 히트를 치고 있던 토요타의 "코로나"와 50년대부터 이미 진출해온 폭스바겐의 "비틀"은 이미 야금야금 빅3의 파이를 조금씩 빼앗으면서 성장하고 있었기에 빅3 중 최약체 취급인 크라이슬러로서 위기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ㅋㅋㅋㅋㅋ 돈복사 존나 달달하노 ㅋㅋㅋ ㅇㅈ합니노 안되겠다. 우리도 소형차를 출시해 다른 회사들과 경쟁을 해야겠어. 결국 크라이슬러는 신형 소형차를 개발 및 출시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물론 비단 크라이슬러만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고, 소형차 개발의 필요성을 느낀 GM과 포드도 이 시기 "핀토"와 "베가"를 출시해 소형차 시장의 파이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 쉐보레 베가 ● 포드 핀토 음.. 다른 회사들은 다들 소형차 전용으로 신형 샷시를 만들었는데.. 우리는 북미에서 이런 차를 파는게 처음이니 원래 있던 걸 좀 다듬어서 내봐야겠구만. 당시 크라이슬러는 북미 시장에 소형차를 출시하는 경험이 처음이었기에, 포드나 GM과 같이 완전 새로운 차를 만들기보다는 시장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기로 결정하고 자사 그룹 산하 기업에서 생산한 차를 가져오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여기서 낙점된 자동차는 크라이슬러 그룹 내의 영국 및 유럽 시장을 담당하던 "힐만"의 "어벤저"라는 차종이었는데, 1970년에 출시된 어벤저는 미국식 콜라병 디자인과 준수한 성능으로 유럽 시장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이에 고무된 크라이슬러 이사진들은 북미에 이 차를 가져와 현지화하여 판매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게 된다. 이 "어벤저"를 판매할 브랜드는 크라이슬러 산하의 저가형 차 전문 디비전인 "플리머스"라는 브랜드였다. 당시 크라이슬러 그룹에서는 일본에서 차를 가져와 현지화해 판매할 브랜드로는 "닷지"를, 유럽에서 차를 가져와 현지화해 판매할 브랜드로 플리머스를 밀고 있었기에 어벤저의 미국 시장 판매를 맡게 된다 북미 시장으로 출시가 결정되며 차명도 어벤저에서 "크리켓 (Cricket, 귀뚜라미)"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폭스바겐의 비틀에서 착안한 것으로, 비틀과 같이 곤충에서 따온 차명으로 자신들도 반사이익을 누리겠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1971년, 크라이슬러 그룹의 큰 기대를 안고 드디어 "플리머스 크리켓"은 미국과 캐나다 시장에 출시되기에 이른다. 유럽에서 판매되던 힐만 어벤저와 북미 현지화된 플리머스 크리켓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았는데, 우선 우핸들에서 좌핸들로 위치 변경, 좌석에 머리받침 추가, 엔진 출력 저하, 그리고 어벤저에서는 고급 사양에만 달려있던 4점식 헤드라이트가 크리켓에서는 기본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던 힐만 어벤저였기에 북미 시장에서도 무리없이 큰 인기를 끌 것이라 생각한 크라이슬러 그룹은 행복회로를 마구 태우게 된다... ???? 시발 이게 뭐노?? 크라이슬러의 기대와는 달리 크리켓은 시장에서 개 쪽박을 친 것이다 당시 크라이슬러는 플리머스 크리켓을 홍보할 때, 경쟁사의 소형차들은 2도어지만, 자사의 크리켓은 4도어라는 점을 어필하며 든든한 패밀리카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때까지 북미에서 소형차는 "돈없는 거지들이나 타는 차, 여편네들끼리 장보러 갈때나 타는 차" 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이런 마케팅이 씨알도 안먹혔다는게 큰 문제였다. 또 여러 사양을 출시해 소비자들의 입맛대로 고를 수 있도록 했던 다른 회사들과 달리, 크라이슬러 그룹은 크리켓이 타사의 소형차들과 다르게 문짝이 4개니 다른 사양을 더 낼 필요가 없다고 안일해하며 4도어 세단 이외의 다른 사양을 출시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내장재가 쩍쩍 갈라지고, 차의 녹을 방지하는 방청 기능도 제대로 탑재되지 않는 등 심각한 품질 문제로 소비자들의 외면을 당했던 것이다. 부랴부랴 개좆된 것을 감지한 크라이슬러 그룹은 크리켓의 품질 개선을 시도하고, 이듬해인 1972년에는 왜건 사양을 추가해 어떻게든 반등을 노리려 했으나 결국 배기가스 강력 규제법인 "머스키 법"과 지속적인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인해 플리머스 크리켓은 1973년을 끝으로 사라지게 된다 더욱이 비참한 점은 크라이슬러 그룹에서 1972년에 크리켓을 더 이상 유럽에서 수입하지 않기로 하면서 1973년에 판매된 크리켓들은 전부 눈물의 할인까지 해가면서 팔아 겨우겨우 연초에 해결한 악성 재고들이었다. 문제는 재고처리를 끝낸 1973년 말, 욤 키푸르 전쟁으로 오일쇼크가 일어나 석유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사태가 벌어지자 포드의 핀토나, 쉐보레의 베가 같은 경쟁사의 소형차들은 경제적인 패밀리카로 둔갑해 엄청난 수혜를 입었으나, 이 시기 크리켓은 이미 진작에 연초에 단종되어 버려 수혜도 입지 못했다. 결국 플리머스 크리켓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대의 억까와 품질 문제로 북미 시장에서 골머리를 앓다가 사라진 비운의 자동차가 되었다. 이 때문에 유럽 시장의 자동차를 북미에 현지화 하는것은 옳지 않다고 판명이 나면서, 크라이슬러 그룹은 닷지 뿐만 아니라 플리머스도 일본차를 미국화하는 브랜드로 재편성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1980년대 크라이슬러 CEO에 취임한 "리 아이아코카" 체제에서 더욱 극심해지게 되었다. 여담으로 북미말고 다른 대륙에 출시된 힐만 어벤저들은 형제인 크리켓과 달리 승승장구 했는데, 이 중에는 1990년까지 가장 오랫동안 생산된 폭스바겐 아르헨티나 지사의 "폭스바겐 1500"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https://youtu.be/YtvYbCqTdkg?si=aiilXpyLbEk2Abae 마지막으로 플리머스 크리켓의 광고를 보면서 끝을 내도록 하겠다 긴 글 읽어줘서 고맙다 다들 오늘도 좋은 하루 되길 바란다 3줄 요약 1. 크라이슬러가 위기감에 유럽차 가져와서 택만 갈아 끼움 2. 크라이슬러의 안일한 대응과 시대적 억까로 폭망함 3. 다른 회사 소형차들은 존버하면서 오일쇼크 수혜라도 입었는데 얘는 그것도 못함
작성자 : 림송철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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